후렝님 생일 리퀘글인 '백안나 나오는거 뭐라도 써줘!!'입니다.(...)
[눈의 여왕 이야기]
by.칡즙
◆
또각, 또각.
얼음으로 된 길을 구두로 연주하며 걸어나간다.
또각, 또각, 또각.
한겨울도 아닌데 사방이 얼음으로 뒤덮힌 동굴 안의 공기는 살이 에일듯이 차갑다.
또각─.
천천히, 하지만 거침없이 이어지던 걸음이 불현듯 멈춘다.
곧바로 자신을 뒤따라 와야 하는 걸음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은 까닭이겠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가 뒤따라오던 누군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여느 때보다 한층 더 시린 물빛의 눈동자.
몸동작에 맞추어 사랑스럽게 너풀거리는 푸른 빛 치맛자락.
사방의 얼음에서 반사되는 빛을 머금은 듯 창백하게 빛나는 하얀 피부.
소복하게 쌓인 눈보다 더 밝고 하얗게 새어버린─ 금빛의 머리카락.
마치 눈의 나라에서 내려온 듯한 아름다운 소녀─안나가 묻는다.
“여기. 맞아?”
“응? 아아, 아마 맞을 거라고 생각해.”
이미 한참 전부터 걸음을 멈춰버린 엘사는 여전히 멈춰선 채로 대답한다.
“그렇구나.”
어딘지 확신이 없는 그녀의 대답에도, 안나는 아무런 의문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리고는 엘사를 돌아보는 시선을 거두고 다시 앞을 향한다. 목이 타는 기분으로 엘사는 쥐어짜듯이 목소리를 내었다.
“안나, 춥지 않니?”
“?”
다시 그녀를 돌아보는 안나의 눈동자는 한없이 차갑고 푸르다. 분명 사방에 가득 돋아나 있는 얼음기둥들 탓이다.
“별로.”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가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여왕님이 추위를 잊게 해주었으니까.”
◇
시작은 사소한 말다툼이었다.
“엘사, 엘사!!”
궁 안에 새로운 냉동고를 만들기 위해 작업이 한창인 제 5 요리재료창고 안에서 직접 현장 작업을 살펴보고 있던 엘사는 사랑스러운 동생의 호들갑스러운 등장에 한숨을 내쉬었다.
“안나, 위험하니까 이쪽으로는 들어오지 말라고─”
“엘사아─!!!”
“!!!”
내벽으로 쓰인 거대하고 매끄러운 얼음벽돌을 다듬는 손을 멈추고 돌아보는 순간 엘사의 몸이 휘청하고 크게 흔들렸다. 쿵쾅거리면서 달려온 속도 그대로 자신의 언니를 향해 다이빙한 안나는 솜씨좋게 그녀의 목에 대롱대롱 매달리면서 브레이크를 걸었다. 사랑스러운 동생의 과격한 어택으로 생을 마감할 뻔한 엘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그렇듯이 차분한 목소리로 안나를 조근조근 타일렀다.
“안나. 그렇게 달리다 넘어지면 위험하잖니. 그리고 여기는 지금 바닥에 얼음이 많으니까 조심하지 않으면─”
“여행 갈래!!”
“...뭐?”
너무나도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엘사는 동생의 부주의함을 타이르는 것도 잊어버린 채 그대로 되묻는다. 잔뜩 흥분한 안나는 언니의 목에 꽉 두르고 있던 팔을 풀고 허공에 붕붕 휘둘러대며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에 서던 제국 너머로 북쪽으로 쭉쭉 나아간 수풀림 안에 꽤 넓은 빙하지역이 발견됐대! 주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만년설이 쌓이고 질 좋은 얼음이 계속 나는 곳이라고.”
“...?”
이야기의 흐름을 종잡을 수 없어 고개만 기울이는 엘사에게 안나는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면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주변은 푸른 숲인데 그 안에 눈밭인 곳이라니! 엄청 신기하잖아! 그렇지? 가보고 싶지??”
“응... 그러게. 신기한 곳이구나.”
“크리스토프가 그 곳이 새로운 얼음 생산지로 괜찮을 지 탐사를 가기로 했거든. 그래서 가는 김에 좀 태워다 달라니까 알았다고 일단 언니 허락받고 오래!”
“응, 그렇구... 잠깐, 뭐라고?”
적당히 안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려주던 엘사는 뒤늦게서야 안나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파악하고는 새하얗게 얼굴을 굳혔다. 얼음장같이 뻣뻣해진 말투로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를 간신히 추스르며 되묻는다.
“그러니까, 그, 지금... 여행을 가겠다는 거지? 그 사람과 함께.”
“응? 응! 크리스토프는 꽤 든든하다구! 여행할 때 꼭 필요한 머슴...아니, 동반자지!”
“그래. 다녀오는데에 얼마나 걸릴 것 같은데?”
“으음, 글쎄? 일주일? 한 달? 여행 같은 건 별로 안해봐서 모르겠네.”
“정확한 위치는?”
“크리스토프가 대충 어딘지 알 수 있을 것 같댔어!”
“.........”
어디서부터 어떻게 지적을 해야 좋을지. 순진한 표정으로 ‘괜찮아? 괜찮아?’하고 연신 눈으로 물어오는 안나를 바라보며 엘사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늘상 사랑스러움이 넘쳐흐르는 자신의 동생이 이 순간만큼은 왜인지 조금 얄미웠다. 외간 남자랑 몇 주인지 몇 달인지 걸릴지도 모르는 기간동안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를 곳으로 여행을 다녀오겠다니. 물론 크리스토프라면 좋은 사람이고, 안나를 잘 보호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 어느 정도 호감이 있는 사이라는 걸 엘사는 알고 있었다. 아니, 누구라도 보면 안다. 두 사람 다 감정을 숨기는 것이 괴멸적으로 서투르니까. 물론 안나는 언제나 언니가 제일 좋아-라고 활짝 웃으면서 말해준다. 하지만 아마 그것과 이것은 다른 문제이다. 안나는 아직 어리다. 사랑에 그저 목말라있어서 구분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안나가 원하는 궁극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단순한 자매간의 친애에 그치는 것은 아니리라. 엘사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그렇게 오랫동안 단 둘이서 함께 밀월여행같은 것을 다녀온다면 틀림없이─ 아니아니, 이건 단순히 언니로서의 걱정이다. 질투라던가 독점욕 같은 유치한 감정이 아니라 그저 순수하게─
“가도 돼?”
그런 복잡한 마음에 엘사는 눈을 반짝이면서 묻는 안나에게 매몰찬 목소리로 딱 잘라 대답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당연히 안돼.”
“어째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소리치는 안나를 보며 엘사 역시 울컥하여 눈썹을 찌푸렸다. 그렇게 그 남자와 같이 놀러가고 싶은 걸까. 나와 같이 궁에서 지내는 하루하루는 그렇게나 지루한 것일까.
“그런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계획을 들이밀면서 억지로 떼를 써도. 안되는 건 안되는 거야. 안나. 너도 아렌델의 공주님이라면 조금 더 제대로 생각하고 말을 하도록 하렴.”
“뭐? 이래뵈도 엄청 생각해서 말한 거라고!”
“생각해서 말했다면 더욱 실망이야, 안나! 그런 누가 들어도 아무런 구체성이 없는 여행 계획이 누군가에게 정말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키이잉. 키잉. 멀찍이서 무언가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뒤를 이어 어지러운 소음이 웅웅거리며 울려퍼지지만 엘사의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라면 금세 눈치챘을 만한 것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여왕님!!! 얼음이!!”
“!!”
투두둑, 툭!
멀리서 들려오는 일꾼의 고함소리를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단단히 묶여있을 있었을 터인 얼음벽돌의 고정 끈이 제 명을 다해 끊어지고 있었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덩어리가 그대로 미끄러지면서 안나를 향해 돌진해온다.
“꺄아아!!”
“안나!!”
엘사는 손을 내뻗었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무작정 내질렀다. 견고한 창고를 위해 무쇠와 같이 단단하게 만들어진 벽돌이었지만, 엘사가 전력으로 내뻗은 얼음의 줄기에 꿰뚫려 산산조각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
안나는 놀란 눈으로 제 앞에서 터져나가는 얼음을 바라보았다. 아주 작은 조각으로 산산히 분해되어 흩날리는 얼음조각들은 마치 눈과 같았다. 그리고 그걸 바라보고 있는 안나는 갑작스레 자신의 오른쪽 눈을 손으로 감싸면서 주저앉았다.
“아야!”
“안나!!”
제자리에 웅크리고 앉아버린 안나에게 엘사는 치맛자락을 걷고 허둥지둥 달려왔다. 엘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안나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다급하게 물었다.
“안나, 괜찮니?! 무슨 일이야! 다친거야?”
“아, 아냐. 그냥 눈에 얼음조각이 좀 들어간 것 같아서...”
으으, 차가워... 안나는 한참동안 쪼그리고 앉은 채로 눈을 부비적거리며 웅얼거렸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자신의 언니가 옆에서 초조하게 어쩔 줄을 몰라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언니도 참 팔불출이라니까. 늘상 완벽하고 냉정한 아렌델의 여왕님이면서 자신과 관련된 일이라면 어쩔줄을 모르는 모습에 안나는 왠지 모르게 뿌듯함을 느꼈다. 안나는 방금까지 목소리를 높이면서 투닥거렸던 것도 잊어버리고 언니가 너무 걱정하지 않도록 괜스레 더 힘차게 몸을 일으키면서 샐쭉 웃어보였다.
“괜찮아, 괜찮아.”
“그래도... 잠깐, 어디 좀 보렴.”
엘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안나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자신의 눈 앞으로 잡아당겼다. 아, 왠지 좀 쑥쓰러운걸. 안나는 괜스레 얼굴을 붉히면서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그런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유심히 관찰하던 엘사는 차갑게 반짝이는 작은 결정을 발견했다. 놀란 눈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며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안나의 눈 밑을 쓸어주는 순간, 그 작은 결정은 언제 있었냐는 듯 스르륵하고 사라져버렸다.
“...아.”
“왜 그래, 언니?”
“안나. 눈, 아프거나 하진 않니?”
“응? 괜찮은데. 왜?”
“아냐, 괜찮다면 됐고. 아까는 소리질러서 미안해.”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안나의 목소리에 엘사는 긴장한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이 곳은 위험하다. 안나를 데리고 나가는 것이 좋겠어. 그렇게 생각한 엘사는 안나에게서 조금 떨어져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단 여기는 위험하니까...”
“......엘사?”
얼어붙은 듯 멈춰버린 엘사를 보며 안나는 이상한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 움직임에 맞추어 가지런히 땋아내린 머리카락이 살랑 흔들렸다.
“엘사? 왜 그래, 멍하니 굳어서...”
시야에 어른어른 잡히는 것은 아침마다 이리저리 뻗쳐서 고생하는 그녀 특유의 붉은 머리카락.
“...어...라?”
그리고 그 사이로 새하얗게 바랜 한 줌의 머리카락이 마른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
“안나! 머리가 하얗게 변했어!”
홀에서 안나와 마주친 울라프는 호들갑을 떨면서 안나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안나는 그런 그의 손을 잡고 같이 뱅글뱅글 원을 그리며 돌면서 실쭉 웃었다.
“이미지 체인지야. 어때?”
“그러고보니 안나, 처음 만났을 때도 머리에 이런 이상한 브릿지 넣었었지?”
“앗, 지금 이상하다고 말했어! 울라프도 이상한 민둥코였으면서!”
안나는 괜스레 심통난 듯 볼을 부풀리면서 울라프를 쭉 밀어냈다. 홀을 가로지른 울라프는 가까운 기둥을 붙잡고 뱅글 돌아 다시 안나에게 달려가 답싹 그녀의 다리에 안긴다.
“멋을 부리는 건 멋진 거야! 보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즐거운 기분이 되니까! 어디보자. 나도 당근 대신 토마토 같은 걸 끼워볼까?”
“그래서야 루돌프잖아, 울라프”
“루돌프울라프!”
“울라프루돌프!”
한 사람과 한 눈사람은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쿡쿡 웃는다. 그러던 중 울라프는 눈을 끔벅이면서 안나의 머리카락을 빤히 바라보았다. 안나는 살짝 어깨를 움츠리면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으응? 왜 그래? 역시 좀 이상한가?”
“아니, 그게 아니라 안나.”
울라프는 고개를 비쭉 미끄러트리면서 안나의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아까보다 좀 더 하얗게 변했어.”
“...어라.”
안나를 가까운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확실히 처음에는 단 한 가닥만 물들어 있던 백금색이 처음 확인했을 때보다 조금 넓게 번진 것 같이도 보였다. 그러고보니 조금 으슬한걸. 안나는 조심스레 자신의 어깨를 슥슥 문질렀다.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저 눈이 조금 따끔하고 아렸을 뿐. 한가닥 짧게 내려온 백금색의 머리카락은 어린시절부터 줄곧 보아왔던 모습이라 하나도 낯설지 않았다. 몸에 이상도 없었고, 그래서 계속 걱정스러운 얼굴로 졸졸 자신을 따라다니는 엘사에게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하면서 집무실로 돌려보냈다.
“그저 예전으로 돌아간 것 뿐이잖아...?”
그렇지? 안나는 거울 안의 자신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파스슥. 머리카락이 조금 더 하얗게 바랜 기분이 들었다.
◆
“괜찮아, 괜찮을거야...”
엘사는 커다란 서재 안의 빼곡히 꽂힌 책등을 손으로 쓸어가면서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확실히 머리카락이 조금 새어버린 것 말고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보였다. 피부도 평소처럼 따듯했고 언제나처럼의 미소도 그대로였다. 안나도 아무 문제 없다며 몇 번이나 자신을 안심시켰다.
- 예전에도 이런 브릿지는 있었잖아?
안나는 그 백금색의 브릿지가 왜 생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이유를 알고 있는 엘사로서는 도무지 안심할 수가 없었다. 어렸을 적 안나를 도와줬던 트롤들이 사는 곳에 대한 지도가 어딘가의 책 사이에 꽂혀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한참을 찾아도 도통 보이질 않았다. 책장을 하나하나 짚어갈수록 엘사는 한층한층 더 불안해졌다. 그러고보니 독서의 날을 기념하여 아버지의 서재 중 동화책이 대부분이던 작은 서재 하나를 일부 국민들을 대상으로 개방한 적이 있었다. 무료나눔과 무상대여로 적지 않은 수의 책이 궁에서 빠져나갔다. 어쩌면 그 지도는 이미 이 궁 안에 없을지도 모른다. 너무 어린 시절, 부모님의 품에 안겨서 한참을 말을 달렸던 길은 아무리 엘사라 해도 제대로 기억해낼 수 없었다. 크리스토프는 그 트롤들과 제법 친한 사이라고 들었다. 그러나 안나에게 넌지시 물어본 결과, 그는 장사를 위해 외지로 출타하여 다음주 쯤에나 아렌델에 돌아온다고 했다.
“내 탓이야.”
먹먹하게 메어오는 가슴에 숨이 막힌다. 진정하자. 아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 안나 말마따나 그저 머리카락이 조금 하얗게 변했을 뿐, 정말로 괜찮은 것일지도 모른다. 콩, 엘사는 작게 책장에 이마를 부딪히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시야 안으로 한 권의 오래된 책이 들어왔다.
“...?”
엘사는 고개를 들고 천천히 그 책을 뽑아들었다. 제목은 ‘눈의 여왕 이야기’. 마법, 혹은 저주와 관련된 서적이 주로 꽂혀있는 이 책장에서 동화 같은 그 책의 제목은 어쩐지 이질적이었다. 엘사는 조심스레 책을 펼쳤다. 책장은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얇고 낡아 있었다. 그림은 없지만 여백이 많고 글귀가 짧고 간결하다. 보이는 그대로 동화책이었다. 엘사는 한장한장 조심스레 책장을 넘겼다.
책의 내용은 어느 마녀에 대한 이야기였다.
눈의 여왕이라고 불리우는 그녀는 말 그대로 언제 어디서든 눈을 몰고 다니는 마녀로,
가까이만 다가가도 참을 수 없이 추워지고, 눈만 마주쳐도 마음이 얼어붙는다.
그녀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아무도 그녀에게 가까워지려고 하지 않는다.
심술과 변덕으로 가득 찬 외톨이 마녀에게 어느 날 한 소녀가 말한다.
- 여왕님의 주변은 너무 차가워요.
- 춥지만 않다면, 좀 더 당신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텐데.
마녀의 입맞춤은 마법의 힘을 갖는다.
첫번째 입맞춤은 추위를 이기는 마법.
마녀는 소녀에게 입을 맞추고, 소녀는 추위를 잊어버렸다.
“여왕님!!”
급작스럽게 들이닥친 신하의 외침에 엘사는 깜짝 놀라 책을 덮었다.
“무슨 일이죠?”
“그것이... 안나 공주님이...!”
쿵.
심장이 차갑게 내려앉는다.
◆
“여왕님!”
울라프는 문을 열고 황급히 침실로 들어선 엘사를 보고 쫑쫑 뛰어가 안겼다. 엘사는 울라프의 손을 잡아 이끌며 침대로 다가갔다.
“안나!”
“아, 언니...”
폭신폭신한 솜털 이불에 폭 덮인 안나의 머리카락은 반절 정도가 새하얗게 변해있었다. 피부도 한층 창백하게 변한 것 같았다. 엘사는 안나의 머리맡에 앉아 조심스레 그녀의 볼을 쓰다듬어보았다. 엘사의 손은 언제가 차가웠기 때문에 안나의 손을 잡을 때에는 언제나 피부가 화끈거릴 정도로 따스했다. 그러나 지금의 안나의 피부에서는 아무런 따스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엘사조차 오싹한 차가움을 느낄 정도로 얼어붙어가고 있었다.
“안나, 어떻게 된 거야?”
갑작스레 쓰러져 버린 것은 안나이다. 당황한 티를 낸다면 안나는 더 불안해하겠지. 엘사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가다듬으면서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힘을 넣었다. 안나는 힘없이 웃어보이면서 꺼져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으응. 갑자기 확 추워져서. 정신을 차려보니까 침대였어.”
“...다친 곳은?”
“없어없어. 괜찮대도. 너무 뛰어다니다가 현기증이라도 났나봐.”
데려다줘서 고마워, 울라프. 안나는 침대 한 켠에서 울망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울라프에게 헤헤-하고 웃어보이면서 웅얼거렸다. 아무리봐도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엘사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쓸어넘기며 물었다.
“상태는 어때? 방이 조금 춥지 않니?”
“으응, 조금.”
거짓말이다. 안나의 어깨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스스로도 자신의 몸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임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사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무작정 괜찮다고만 하는 것이다. 어쩐다. 어쩌면 좋지. 엘사는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안나의 손을 꼭 붙잡으면서 질끈 눈을 감았다.
마녀는 소녀에게 입을 맞추고, 소녀는 추위를 잊어버렸다.
“...!”
머리 속을 스치는 속삭임에 엘사는 놀라서 번쩍 눈을 떴다. 책에서 읽은 단순한 문장이었을 뿐인데, 그것은 마치 마법의 주문처럼 그녀의 뇌리에 박혀 맴돌았다.
“...엘사?”
엘사는 이끌리듯이 안나의 손을 끌어당겨 그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에, 에에에엘사?!”
“......?!!”
안나의 외침에 엘사도 덩달아 놀라 안나의 손을 내던지며 파드득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보면 별것 아닌 스킨쉽이었는데도 엘사의 가슴은 마치 나쁜 짓이라도 한 양 쿵쾅거리며 요동을 쳤다. 허둥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안나는 키스를 받은 자신의 손을 가슴에 끌어당기면서 눈을 깜박거렸다.
“엘사, 저기─”
“아니, 아니야. 안나! 언니가 이상한 마음으로 그런 게 아니라...”
"엘사? 그러니까 그게,"
"없던 일로! 아까 전 일은 없던 일로...! 그냥 잊어버리렴."
엘사는 스스로도 왜 이런 변명을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면서 일단 고개를 휙휙 가로저었다. 안나는 허둥거리는 엘사에게 몇 번이나 말을 걸려다가 도무지 안되겠다 싶었는지, 덥썩 그녀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엘사!”
“네?!”
안나는 자신의 부름에 부동자세로 멈춰버린 엘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다른 한쪽 팔을 붕붕 돌리면서 말했다.
“몸이 갑자기 괜찮아졌어!”
“뭐? 설마...”
엘사는 손을 뻗어 안나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그녀의 피부는 여전히 창백하고, 조금의 온기도 돌아오지 않은 채였다. 하지만 방금전까지만 해도 추위에 떨고 있는 안나는 너무나도 멀쩡하게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와있었다. 거짓으로 몸이 회복된 척 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데. 엘사는 의아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심하여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졌다니 일단 다행이지만. 혹시 모르니 이불은 꼭 덮고 오늘은 일찍 푹 자도록 해. 알았지?”
“에─ 괜찮은데에─”
안나는 볼을 부풀리면서 엘사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새하얗게 매끄러운 피부. 화려하면서도 겸양있는 금발의 머리카락. 영롱한 얼음같은 푸른 빛의 눈동자. 자신의 언니여서가 아니라 안나는 진심으로 그녀가 이 왕국, 아니 전세계의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소매를 잡은 자신의 손을 흘끗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엷은 주근깨가 박힌 건강하고 혈색 넘치는 그녀의 피부가 지금은 엘사를 닮은 창백하고 깨끗한 색으로 변해있었다. 그러고보니 변한 머리카락의 색도 엘사의 금발과 어쩐지 닮아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서 안나는 샐쭉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언니! 대신 오늘 밤은 같이 잘래!”
“뭐?”
“알았지? 엘사도 오늘은 업무같은 거 빨리 끝내고 일찍 자는거야!”
“순 어리광쟁이라니까.”
알았어. 엘사는 못 이기겠다는 듯 미소지으며 안나의 코 끝을 톡톡 두들겨주고 돌아섰다. 침실을 나서자 같이 따라나온 울라프가 종종걸음으로 달라붙으며 물었다.
“여왕님 일하러 가요? 일 안하기로 했는데.”
“알았어, 울라프. 오늘은 일찍 잘테니까.”
“정말?”
“정말정말. 잠깐 서재에 들렀다 올테니까. 내가 돌아올때까지 안나 곁을 지켜주렴. 할 수 있지?”
“네!”
울라프는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거리며 침실로 되돌아갔다. 침실의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엘사도 뒤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밤이 깊어 있었다. 창밖에서 흘러들어온 어둠이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이렇게나 조용한 밤인데도 마음은 한없이 어지럽다.
“별일 없을거야.”
엘사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면서 벽에 몸을 기대었다.
◆
추위를 잊은 소녀는 마녀를 따라 숲 속의 얼음궁전으로 향했다.
마녀의 성은 아무도 찾아올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멀고 먼 곳에 있었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소녀는 불현듯 눈물을 흘렸다.
어째서 우느냐고 묻는 마녀에게 소녀는 대답했다.
- 마을에는 가족과, 친구들과, 사랑하는 연인이 있어요.
- 내가 사라진 것을 알면 다들 걱정하겠죠?
- 특히나 그는 무척이나 슬퍼할 거에요.
소녀는 괴로워했고, 마녀는 그런 소녀에게 한 번 더 마법을 베풀었다.
두번째 입맞춤은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마법.
마녀는 소녀에게 입을 맞추고, 소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잊어버렸다.
◆
몸에 변화가 생긴지 3일 정도가 지나자, 안나의 외견은 완전히 변해버렸다. 머리카락은 완연한 백금발로 바뀌었고, 피부는 얼음장같이 차갑게 얼어붙어 하얗고 창백한 눈의 색을 띄었다. 그러나 완전히 변해버린 외모를 제외하면 안나는 평소와는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여전히 활기차게 쿵쾅거리면서 복도를 가로지르고, 울라프와 술래잡기를 하고, 가끔을 사고를 쳐서 엘사에게 혼이 났다. 처음에는 노심초사하며 그녀를 지켜보던 엘사도 평소와 다름없는 그 모습을 보면서 조금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래도 역시, 원래대로 돌려놓을 방법을 찾는 것이 좋겠지.’
급한 업무를 끝내고 서재를 찾은 엘사는 며칠 째 계속해 온 안나의 몸의 이상을 풀 수 있을만한 방법의 탐색을 재개했다.
“......”
시선이 이제는 익숙해진 한 책표지에 머물렀다.
“눈의 여왕 이야기라...”
안나의 몸상태가 나아진 후로 몇 장 더 뒷내용을 읽어보았지만, 어쩐지 꺼림칙한 내용이 이어지기에 끝까지 읽지 않고 덮어버렸다. 엘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른 책장으로 이동했다.
“...후.”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밤이 깊어있었다. 오늘도 별다른 소득은 없었군. 엘사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는 서재를 빠져나왔다. 안나는 벌써 잠들었을까.
“어라...”
조심스럽게 침실의 방문을 열어보았지만 침대는 비어있었다. 이 밤중에 어디로 갔을까. 엘사는 궁내를 둘러보면서 안나의 모습을 찾았다. 안나가 자주 들락거리는 방들을 하나하나 찾아보았지만 도통 보이지 않는다.
“여기 있었네.”
혹시나해서 마지막으로 들러본 집무실에서 간신히 안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안나는 길다란 소파 위에는 웅크리고 누운 채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빈 집무실에서 엘사를 기다리다가 그만 잠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일국의 공주님이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는 궁상맞은 모습이지만 엘사의 눈에는 그저 귀엽게만 비춰졌다. 그녀의 머리 맡에 앉아서 어둠 속에서도 환히 빛나는 백금색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안나, 침대로 가서 자야지”
“우웅...하나만 더 먹고...”
뜻 모를 잠꼬대에 풋-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어쩐지 재미있어져서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안나는 계속해서 몸을 뒤척이며 뭉개지는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뭐라고 하는 걸까? 잘 들리지 않아 엘사는 조금 더 귀를 가까이 했다.
“으응... 갈래...”
“어디를?”
엘사가 장난스레 되묻자 안나는 정말로 대답이라도 하듯이 잠꼬대를 잇는다.
“...얼음...”
“...?”
물론 제대로 이어질리가 없는 대답이지만 엘사는 어쩐지 불안한 기분에 몸을 뒤로 빼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에 이어지는 안나의 목소리는 제법 또렷해서 엘사의 귀에 확실하게 닿았다.
“─크리스토프.”
어째서 우느냐고 묻는 마녀에게 소녀는 대답했다.
크게 귀울음이 울린다. 눈 앞에 새하얗게 눈보라가 들이쳤다.
“...”
머리 속을 파고드는 차가운 한기에 엘사는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떨쳐내려고 억지로 외면한 글귀가 덩쿨처럼 뇌리에 감겨들었다. 마법이 걸려있는 책임에 분명하다. 필시 지독한 마녀의 저주가 걸려있으리라. 자신의 가장 추한 모습을 마주보게 만드는, 악독하기 그지없는 흉악한 저주가.
“......”
안나는 잠꼬대를 멈추고 다시 깊은 잠에 빠져버린 모양이었다. 엘사는 그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천천히, 그러나 망설임 없이. 공주님을 맞이하는 왕자님처럼 그 앞에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 앉는다. 차갑게 식은 가슴이 점점 그 맥을 빨리한다. 사랑스러운 나의 동생. 나의 안나.
“안나.”
인정하자.
나는 안나를─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아.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어주렴.”
마녀는 소녀에게 입을 맞추고, 소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잊어버렸다.
칠흑의 밤이 가슴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말없이 미소지으며,
그 섬찟한 감각에 기꺼이 굴복하여─
엘사는 차갑게 식은 안나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
창 밖에서 울리는 지루하고 단조로운 새소리에 눈을 뜨자 호화롭게 꾸며진 방의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좋은 아침, 안나!”
눈을 뜨자마자 희한하게 생긴 눈덩어리가 쪼르르 달려왔다. 살아있네. 움직이네. 흔하지 않은 생명체에 일어나는 옅은 호기심에 고개를 갸웃하면서 묻는다.
“...눈사람?”
“안나? 잠이 덜 깼나? 얏호! 좋은 아침!!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눈사람, 울라프에요!”
눈사람은 호들갑스레 인사를 하며 요란스레 뛰어다닌다. 그 부산스러움에 살짝 눈썹을 찌푸리면서 유심히 그 모습을 살펴보았다.
“어라? 안나? 어쩐지 모습이 이상하네. 괜찮아요? 열은 없나? 어디어디─ 힉!! 왜이렇게 차갑지??”
눈사람은 몸통에 박힌 나뭇가지를 뻗어 열을 재듯 이마를 짚어보더니 깜짝 놀라 야단스레 방을 빠져나갔다.
“차가워?”
‘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가만히 짚어보였다. 특별히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 고개를 갸웃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방에 익숙한 침대. 응, 내 방이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똑똑─
“안나?”
“네.”
이름이 불려 자연스레 대답을 하자, 조심스럽게 문이 열린다.
“안나...?”
이번에 들어온 것은 사람이었다. 흐트러진 금발이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차분하고 성숙한 얼굴의 미인. ‘안나’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이렇게 예쁜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안나’는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누구세요?”
◆
쾅─!!
엘사는 부서트릴 기세로 문을 열어젖히며 집무실로 들어섰다. 아침의 업무 보고를 준비하고 있던 신하들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여왕의 모습에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 여왕님...?”
“당분간 업무는 중지해요. 최대한 마감까지 미루세요. 급한 일이 있다면 대리결재를 허합니다.”
엘사는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며 빠르게 말했다. 어안이벙벙해진 신하들은 한참을 눈만 끔벅이다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물었다.
“엘사 여왕님? 무슨 일이라도...”
“지금 당장 말을 준비하세요. 안나의 외출복도. 30분 내로. 사람을 보내 크리스토프를 찾아오도록 하세요.”
“네? 그게 무슨...!”
“잠시 자리를 비웁니다. 안나도 함께.”
뒤따라오는 신하들의 말을 무시하며 엘사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흐트러진 거친 걸음이었다. 엘사는 화가 나 있었다. 어제 밤의 자신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해 있었다. 대체 나는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그 책이...!”
그 책이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 아니, 다 변명이다. 엘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떠한 마법이든 저주이든 꺾여버린 것은 자신이다. 모든 것은 엘사 자신의 탓이었다.
쾅─! 거칠게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생각치도 못한 누군가의 모습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
탁상 앞에 오도카니 서 있던 안나는 요란스럽게 열린 문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엘사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여전히 사랑스러웠지만, 무언가 아주 결정적인 것이 빠져있었다.
“아, 여왕님.”
안나는 고개를 살풋 기울이면서 평이한 어조로 그녀를 맞이했다. 한없이 평탄하고 아무런 기복이 느껴지지 않는, 끝없이 단조로운 목소리. 너무나도 익숙한 그 목소리는 끔찍할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혹여라도 꿈을 꾸는 것은 아닌지, 얼토당토않은 기대를 하고 있던 엘사는 현기증을 느껴 잠시 벽에 몸을 기대었다.
“어지러워요?”
“아니, 잠시 현기증이 난 것 뿐이야.”
엘사는 안나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물었다.
“안나, 내 방에서 무엇을 하고 있니?”
“책이 있어서.”
“...?”
의미를 알 수 없는 안나의 대답에 엘사는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나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아까 전까지 탁상 위를 가리켰다.
“!!”
어째서 저 책이 저런 곳에 있지? 엘사는 황급히 탁상 위에 놓여 있는 책을 집어들었다. 안나의 시선이 그 책을 따라왔다.
“안나. 이 책, 네가 가져온 거니?”
“아니. 원래부터 여기에 있었는데.”
“...원래부터...?”
안나는 그 책을 빤히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엘사는 책을 탁자 위에 다시 내려놓으면서 안나에게 물었다.
“책... 읽어봤니?”
“응.”
안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책에서 눈을 떼고는 이번에는 엘사를 바라보며 재차 묻는다.
“여왕님은 마녀인가요?”
“.........”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는 엘사를 두고 안나는 차근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책에 씌여 있었어요. 첫 번째 마법으로 추위를 잊고, 두 번째 마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잊었대요.”
“......그래.”
“그렇다면 여왕님이 저의 연인인가요?”
수많은 가시바늘에 심장을 찔리는 고통에 엘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엘사의 마음은 점점 더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렇구나. 엘사는 깨달았다. 어느새인가 점점 그녀는 책 속의 마녀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최대한 여유로운 척 웃음을 흘리면서 엘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나, 너는 울라프도 잊었잖니. 궁 내의 친한 신하들도, 마을에서 자주 어울리던 아이들도, 분명 그 남자도 기억하지 못하겠지.”
“...그 남자?”
“네 주변의 모든 이를 잊어버렸다는 건, 네가 모두에게 사랑받고 모두를 사랑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란다.”
“...”
“사람을 잊어도 감정은 남아. 감정이 남으면 언젠가 기억이 돌아오겠지.”
“......?”
그렇기에 두 번째 마법은 단지 사랑하는 사람을 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감정 그 자체를 잊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었던 그녀이기에 결국 모든 감정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겠지. 안나는 그런 아이었다. 누구보다도 잘 웃고, 누구보다도 활발하고,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아이. 어느 누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안나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렌델의 공주님. 그런 그녀를 누군가 혼자만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리 없었는데. 그 남자도. 그리고 나도.
열린 창문으로 흘러들어오는 바람이 망연히 서 있는 엘사를 스쳐 탁자 위에 올려진 책의 얇은 책장을 넘겼다. 아직 읽지 않은 마지막 페이지가 눈에 들어왔다.
단 둘이 되어버린 성 안에서 마녀는 묻는다.
- 무엇을 원하느냐.
- 네게 무엇을 더 해주면 좋겠느냐.
소녀는 더 이상 웃지 않는다.
마녀는 마지막 마법을 소녀에게 주었다.
마지막 세번째 입맞춤은 ───
“...어째서.”
마지막 문단은 찢겨져서 더 이상 알아볼 수 없었다. 이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 엘사는 막막함에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나, 외출 준비를 하세요.”
“응? 어디로?”
안나의 질문에 엘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트롤들의 정확한 위치를 아는 크리스토프는 언제 아렌델로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그를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그 시간동안 차라리 기억을 더듬어 길을 찾아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다. 일단 크리스토프가 귀환하는대로 연락을 하도록 몇몇의 신하에게 일러두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엘사는 곧바로 외출을 서두르기로 했다. 시도때도 없이 몸을 덮쳐오는 검은 감각에 뭐라도 행동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제 자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애초에 그저 가만히 앉아서 안나의 저런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을 자신도 없었다. 엘사는 시녀들이 준비해온 안나의 망토를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며 입을 열었다.
“안나. 이제 출발─”
“숲 속의 얼음궁전은 어떻게 생겼을까?”
“......”
숲 속의 얼음궁전이라니. 엘사는 곧 책의 내용을 떠올렸다. 아니,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이미 모든 문구가 그녀의 머리 속에 확연히 남아있었다. 마녀의 성은 숲 속의 얼음궁전이라고 했다. 도통 상상이 되지 않는 기묘한 조합이다.
- 주변은 푸른 숲인데 그 안에 눈밭인 곳이라니! 엄청 신기하잖아! 그렇지? 가보고 싶지??
“어디로 가요?”
안나의 질문에 엘사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숲 속의 얼음궁전으로.”
길을 잃을 걱정은 없다.
얼어붙어 있다면 어디든, 그녀가 도달하지 못할 곳은 없으니까.
◆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마치 이끌리듯이 두 사람은 마녀의 성에 도달했다.
우거진 수풀림 안에 있는, 주변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눈 쌓인 얼음 동굴. 그 내부는 보통 사람이라면 함부로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추웠지만 엘사와 지금의 안나에게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안나, 조심하렴.”
엘사는 온통 얼어붙은 동굴 안에 이어진 길을 따라 멍하니 걸어가는 안나의 팔을 살며시 잡아당겼다.
“?”
감정없이 시린 새파란 눈동자가 엘사를 향했다.
“바닥이 미끄러우니까. 넘어지면 다쳐.”
“아아, 응.”
“따라오렴.”
엘사는 다시 걸어가려는 안나의 손을 잡아 세우고 자신이 살짝 먼저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활발하게 뛰어다니는 안나는 바닥이 미끄러운 곳에서만큼은 도통 힘을 쓰지 못했다. 스케이트로 열심히 가르쳐주었지만 도무지 실력이 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넘어지고는 울상이 되어서 허리에 달라붙곤 했었지. 엘사는 그런 기억을 떠올리면서 옆에서 따라오고 있는 안나를 바라보았다.
“...?”
백발의 안나는 밀랍같은 얼굴로 아무런 두려움 없이 걸음을 내딛는다. 비틀비틀 발 밑이 흔들리는 것을 보니 그저 겁이 없어졌을 뿐, 빙판을 지치는 것에 갑자기 익숙해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엘사는 안나가 내딛는 바닥의 얼음을 미끄러지지 않도록 거칠게 다듬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나 그렇게 들어갔을까.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면서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여긴...”
엘사는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언뜻 보기에는 그저 넓은 빙판만이 펼쳐져 있을 뿐이지만, 자세히 바닥을 살펴보니 기이한 문자가 정신없이 나열되어 있었다. 도무지 읽을수는 없었지만 엘사는 어렴풋이 이것이 무언가의 마법식들을 정리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제대로 찾은 것이다. 엘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볼에 홍조를 띄웠다. 물론 당장은 알아보기는 어렵지만 이것이 마녀의 주술과 관련된 것이라면, 분명 안나에게 걸린 저주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저건...?”
넓은 공간의 끄트머리에는 잘 다듬어져 있는 넓은 얼음 단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석판들이 가지런히 나열되어 있었다. 안나 역시 거기에 눈길이 갔는지 휘적휘적 얼음판 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안나!”
엘사는 금세 크게 휘청이는 안나의 팔을 황급히 붙들었다. 아플 정도로 세게 붙들린 팔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것을 봐서는 미끄러질 뻔한 것보다 갑자기 낚아채인 것에 조금 더 놀란 모양이었다. 안나는 손을 들어 단상 위를 가리켰다.
“저기, 뭔가 있어서.”
“그래. 알아. 같이 가보자.”
단상에 올라보니 석판처럼 보이던 그것이 실은 돌이 아니라 얼음이었다는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알아볼 수 있는 글자였다. 게다가 매우 익숙한 문구들.
“이건...”
“책 내용이네요.”
“...그렇구나.”
얼음판에는 눈의 여왕 이야기의 내용이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파손 된 부분은 없이 모두가 깨끗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마지막 페이지도 분명 제대로 보존되어 있을 것이다. 엘사는 얼음판을 한장한장 확인해가며 마지막 판 앞에 섰다.
마지막 세번째 입맞춤은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리는 것.
“...!”
처음보는 문구에 엘사의 눈이 커졌다. 되돌린다니. 모든 것을 없던 것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의미일까. 그렇다면 분명 새하얗게 얼어버린 안나의 심장도, 그리고 새까맣게 물들어버린 자신의 마음도 원래대로 돌이킬 수 있으리라.
마녀는 소녀에게 입을 맞추고─ 소녀는 모두에게 잊혀진 채, 눈이 되어 사라진다.
서늘하고 불쾌한 감각이 전신을 꿰뚫고 지나갔다. 아니, 그럴리가 없어. 엘사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뒤로 물러섰다.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숙이고 입을 틀어막았다.
“여왕님? 무슨 일이에요?”
엘사의 이상한 태도에 뒤에서 지켜보던 안나는 빼끔 얼음판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
엘사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그런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안나! 돌아가자.”
“하지만 이거, 책의 마지막 내용이 적혀있어요. 필요한 것 아니야?”
“필요없어, 그런 것.”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다. 이런 악독한 저주의 끝이 행복하게 마무리 지어질 리가 없었다. 무엇을 기대했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당장 아렌델로 돌아가자. 온 산을 다 뒤져서라도 안나를 고쳐줄 트롤들을 찾아내면 그만이다. 하지만 엘사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이 마법은 아마 그들이라 해도 결코 풀 수 없을 것이다. 어쩐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아니, 어쩐지 모르게-같은 애매한 추측은 그만두자. 이 저주는 결코 그들이 풀 수 없다. 엘사는 그것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엘사 그녀 자신이 직접 마녀가 되어 걸어버린 주문의 위력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안나, 가요.”
여기서 나가자. 엘사는 차가운 안나의 손을 잡은 채로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걸음 더 나아가다가 금세 멈추어버렸다. 이제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다르구나.”
애초에 가야 할 길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여왕님.”
황망하게 멈추어 서 버린 엘사에게 안나의 바싹 마른 목소리가 닿는다. 엘사는 잡고 있는 손을 놓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얗게 빛나는 백금발의 머리카락의 잘 조각된 얼음인형. 사랑스러운 얼굴은 그대로인데, 그녀가 알던 안나는 이제 없었다. 그 안나를 치졸하고 옳지 못한 이기심에 없애버린 것은 자신이었다.
“여왕님.”
“...왜 부르니, 안나.”
울먹이는 목소리로 작게 대답하는 엘사에게 안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에게 세 번째 마법을 걸어주세요.”
“...뭐...?”
전혀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엘사는 할 말을 잃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 안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엘사는 주체할 수 없이 흔들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니?”
“응. 죽는다는 거죠?”
스스럼없이 나온 안나의 말에 엘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걸 알면서도 태연하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렴.”
집으로 돌아가자. 엘사는 안나의 손을 잡아 당겼다. 늘 순순히 끌려오던 안나였지만, 이번에는 돌처럼 굳은 채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안나?”
안나는 자신의 손을 꼭 마주잡고 있는 엘사의 손을 바라보았다.
“괴로워보여요.”
“뭐가?”
“여왕님이.”
나는 분명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테지만, 그럴 테지만─ 안나는 마치 책을 읽어나가듯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처음 제가 당신에게 누구냐고 물었을 때 여왕님은 너무나도 상냥하게 웃어주시면서 ‘이 아렌델의 여왕이고, 이름은 엘사이며, 네 언니란다’하며 대답해주셨잖아요."
"...그래."
"기억을 되찾기 위해 모든 일을 그만두고 이렇게 열심히신데, 저는 여전히 당신이 기억나지 않아요.”
“안나. 너는 잠시 나쁜 마법에 걸린 것 뿐이야. 집으로 돌아가서 방법을 찾아보자.”
“그 때의 여왕님은 왠지 울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안나...”
“곁에 있으면 괴로운가요? 당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안나는 눈썹을 찡그리면서 어색하게 입고리를 당겨 웃는다. 누구보다도 잘 웃던 그녀가 이제는 힘겹게 미소를 억지로 지어낸다. 감정을 잃어버린 그녀가 웃는 모습은 어쩐지 최근의 엘사의 웃는 모습과 닮아있었다.
“그렇지 않아.”
“하지만 여왕님. 지금도 울고 있는 걸.”
안나는 손을 뻗어 엘사의 볼을 가볍게 훑어주었다. 엷은 얼음조각이 그녀의 손에 뭍어났다.
“주변의 무엇을 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데, 여왕님을 보면 가슴이 아파요.”
“안나.”
“오는 내내 제 손을 잡아주셨잖아요. 얼음판 위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안나, 그만해.”
“저는 그게 너무 좋았어요.”
그렇게 읊조리는 안나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배인다. 억지로 꾸며낸 것이 아닌 작디 작은 감정의 파편.
“여왕님이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틀려, 안나.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내가─”
달싹이는 엘사의 입술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안나의 입술이 맞닿는다.
“나, 왠지 알 것 같아요.”
놀란 눈으로 멍하니 굳어져버린 엘사를 보며 안나는 조금 쑥쓰러운 듯이 헤헤-하고 웃는다.
“내가 잊어버린 연인은 분명 여왕님이었을거야. 그렇죠?”
자그마한 소녀의 몸은 한층 더 하얗게, 한층 더 차갑게 변해간다. 어찌 손쓸 도리도 없이 눈덩어리가 되어가는 그녀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안녕, 여왕님. 안녕, 엘사.”
안녕, 내가 가장 사랑했을 나의 언니─
“안나! 안돼...!”
엘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릴없이 바스러져 손가락 사이로 흩날려 스러지는 눈송이를 붙잡는다. 손 안에 잡히는 것은 잠시간의 차가움 뿐. 펼쳐보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안나...”
그렇구나. 이런 형태를 갖춘 몸으로는 사라져버린 안나를 붙잡을 수 없구나. 엘사의 눈이 안나가 흩어져버린 허공을 향한다. 길이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소녀들은 모두에게 잊혀진 채─ 눈이 되어 사라진다.
◇
“안나!!!!”
“어맛, 깜짝이야!!”
귀를 파고드는 익숙한 목소리에 엘사는 얼이 빠진 얼굴로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언니, 무슨 기상이 그렇게 요란해? 숙녀되긴 글렀네요.”
의자와 함께 나동그라진 안나는 바닥에 세차게 찧어버린 자신의 엉덩이를 슥슥 문지르면서 끙끙거렸다. 일국의 공주님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볼품없는 자세. 불만스레 부풀린 장난기 머금은 양 볼. 그리고 그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새하얀 백금색의 머리카락.
“아, 안나...?”
“응? 그러니까 왜 자꾸 부르는... 아아, 이거 때문에 그렇구나.”
안나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꾹꾹 잡아당겨보였다.
“엘사 그건 기억나? 내 눈앞에서 얼음을 빵 터트렸을 때. 내 머리 한 가닥이 예전처럼 하얗게 새어버린거.”
“아, 으응.”
“그거 보고 엘사가 기절했잖아. 일주일 동안.”
“...뭐?”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멍하니 눈만 깜박거리는 엘사는 내버려두고, 안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린 엘사를 보고 신이 나서 재잘재잘 쉴새없이 말을 잇는다.
“정말이지 태평한 언니라니까. 무슨 꿈을 꾸는지 안돼~라던가 그만둬~같은 잠꼬대나 해대고 있고. 대체 무슨 꿈을 꾼거야? 중간중간 엄청 악몽같아 보이기도 하고.”
“그, 그게...”
“하여간 이게 다 일을 너무 한 스트레스라고 의사선생님이 그러더라고!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일주일씩이나...나 엄청 걱정했다니까!!”
“미...미안?”
“어쨌든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는 의사선생님의 명령이야! 앞으로 당분간은 저녁 6시에 퇴근! 9시까지는 나랑 놀기! 10시에는 취침! 아 그러고보니 오늘 아침에도 말이야─”
“안나, 잠깐만! 정신이 없으니까 하던 이야기만 계속해줄래?”
엘사는 정신없이 뒤바뀌는 안나의 화제에 현기증을 느끼면서 이마를 짚었다.
“어라? 열나? 어디어디.”
“...!”
불쑥 뻗어 이마를 짚어주는 안나의 손은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차가웠다. 엘사가 흠칫 어깨를 움츠니자 안나도 깨달은 듯 아차-하고 혀를 차며 물러났다.
“그러고보니 나 피부도 엄청 차가워졌구나. 이래서야 열을 재는게 의미가 없네. 잠깐만, 어딘가에 체온계같은게... 아니. 생각해보면 엘사가 열 같은 게 날리가 없지?”
“아, 안나!! 일단 진정하고. 어디 아픈데는 없어? 몸은 괜찮은거야?”
엘사는 다시 부산스럽게 주변을 헤집으려는 안나의 어깨를 붙잡아 세우면서 다급하게 물었다. 안나는 평소와는 다르게 영 정신이 없어보이는 엘사의 모습에 적응이 되지 않는 듯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이내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엘사가 잠 덜 깬 모습 너무 웃기다!”
“안나!”
“푸흐, 푸하하...아, 아니아니. 네. 아닙니다. 안 웃었어요. 안 그래도 예전에도 한번 이렇게 변한 적 있었거든.”
“그, 그랬어?”
“어라? 몰랐어? 그거 엘사 탓이었는데.”
“뭐...?!”
“아아, 시기상으로 엘사는 본 적이 없겠구나.”
완전 얼음조각상이 되어버린 후에 봤으니까! 센스가 의심되는 농담을 터트리면서 안나는 새파랗게 굳어버린 엘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로 말을 이어나간다.
“어쨌든 나도 걱정이 되고 하니까 크리스토프가 돌아오자마자 닥달해서 바로 트롤들에게 달려갔지. 다행히 별 건 아니고. 비슷한 마법의 영향을 좀 받아서 몸이 놀란거래. 몇 주 지나면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고 그러더라.”
“........그, 그래.”
엘사는 엉망으로 들쑤셔진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히면서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별 이상이 없다니 다행이었다. 다행이다. 정말로. 모든 것이. 엘사는 깊은 피로감을 느끼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감고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의사의 말이 맞다. 그녀는 지쳐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몸이 격렬하게 휴식을 원하고 있었다. 이대로 한숨 더 자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엘사는 살짝 눈을 떴다. 백금발로 변해버린 동생이 침대 맡에 쪼그리고 앉아서 강아지같은 눈으로 자꾸만 이 쪽을 흘끔흘끔 바라보고 있었다.
“...안나? 뭔가 할 말이 있니?”
“저기... 그러니까.”
안나는 한참을 주저주저 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언니가 그렇게 싫어하면... 역시 여행은 그만두는 게 좋겠지?”
“......”
“앗, 아닙니다. 아니에요.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엘사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안나는 아니라는 듯 이내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붕붕 내저었다.
나는 안나를─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아.
“...읏!”
아직도 마음 속 한켠에 생경하게 남아있는 그 질척한 감정에 엘사를 자신의 팔을 감싸안았다. 꿈의 잔재인지, 자신의 무의식인지. 어느 쪽이든 최악이었다.
“엘사? 괜찮아? 역시 아직 몸이 안좋은가?”
안나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그 너무나도 안나다운 행동에 엘사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배였다. 어쩌면 이리도 사랑스러울까. 분명 세상의 모든 사랑스러움을 모은다 하더라도 안나를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런 안나를 모두가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안나가 모두를 사랑하는 것도 당연하다. 자그마한 욕심으로 그녀를 속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엘사는 결심한 듯,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끔은 여행도 나쁘지 않겠지.”
“앗! 정말?! 얏호! 역시 언니가 짱이야!! 사랑해!!”
호들갑을 떨며 자신에게 안기는 안나를 보며 엘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나 좋을까. 한동안은 궁에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데. 조금은 섭섭한 기분이었다.
“앗, 그럼 언제가 좋아? 엘사가 한가할 때가 좋겠지 역시?”
“........응?”
“..................응?”
“...........................으응??”
“아니, 그러니까 같이 가려면 아무래도 맨날 한가한 내가 아니라 늘 바쁜 엘사의 스케줄에 여행 일정을 맞춰야─”
“같이...?”
이번에야말로 얼이 단단히 빠진 목소리로 엘사가 묻는다.
“그럼 누구랑 간다는 거야! 언니도 참. 나 혼자 돌아다니면 뭐해! 좋은 건 같이 봐야지!”
“아니. 그, 크리스토프는?”
“응? 그건 운전수.”
“.........으응.”
“나랑! 언니랑! 둘이서 가는 거야! 아, 울라프도! 좋지?? 좋지???”
어쩐지 당분간은, 아니 꽤 오랫동안은 안나가 누군가에게로 가버릴 일은 없겠구나. 엘사는 왠지 모를 동정심에 운전수로 전락한 사랑의 희생자에게 마음 속으로 말없이 작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
“그래. 즐겁겠다.”
“야호! 그럼 당장 여행 계획을!! 나 그럼 달력 가져올께!!”
“아, 잠깐 안나! 복도에서 뛰지 말고! 넘어─”
와당탕!!!
“─진다니까...”
◇
[후일담]
“뭐어야아? 무슨 그런 꿈을 꿔? 으히이익... 언니 힘들었겠다.”
“으응? 아니... 꿈은 그냥 꿈이니까.”
며칠간은 무슨 꿈을 꾸었냐며 끈질기게 물어오는 통에 엘사는 하는 수 없이 적당히 꿈의 일부를 들려주었다. 안나가 마법에 걸려-키스부분은 검열삭제- 추위를 잊는 이야기, 주변 사람들을 잊어갔던 이야기, 잊혀진 사람들 중에는 엘사도 있었다는 이야기. 감정마저 잊어버렸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으으. 싫다. 기억상실증 같은 거 걸리기 싫어.”
안나는 몸서리를 치면서 울상을 지었다. 실제로 겪은 것도 아니고 심지어 자기가 꾼 꿈조차 아닌데도 안나는 그것이 싫은 모양이었다. 그 이후에 이어졌던 더 끔찍한 꿈 이야기는 역시 안하길 잘했어. 엘사는 스스로의 판단에 만족해하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는 안나를 토닥이며 달래주었다.
“하지만 역시 꿈은 꿈이네.”
“응?”
“꿈의 안나씨는 나랑 전혀 다른걸. 내가 언니를 잊을 리가 없잖아?”
“어머, 그걸 어떻게 확신한담?”
“그야 언니는 나의 트루러브잖아!”
“...........................”
“...........??”
“..........................................”
“....................엘사?”
긴 침묵 끝에 엘사는 당부하듯이 안나에게 말했다.
“안나. 어디가서 아무한테나 그런 말 하면 안돼. 잡혀가니까.”
“뭣, 잡혀가는거야?”
“과도사랑스러움죄로 잡혀가니까. 알았지?”
“여왕님, 내빈께서 조금 일찍 도착하셨습니다. 나와보시는 것이.”
“아아, 알겠어요. 그럼 안나. 잠시 다녀올께. 소란스럽게 하지 말고 있으렴.”
“네에─”
탁자에 턱을 괴고 황급히 나가느라 제대로 닫히지 않은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안나는 중얼거렸다.
“언니한테밖에 안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