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후렝님이 서연비월 써달라고 땡깡부리면서 대화록을 박제하고 서연비월 로그를 3개나 펑펑 그려버리는 바람에
무를수도 없고 아시발망했네 하면서 쓴 리퀘글입니다. 설정 대파괴에 대한 문의는 NC에 해주시길 바람.
"서연."
서늘한 산바람을 타고, 나즈막히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
서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제 앞에 몇 발자국 더 나아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리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에 아직 그녀의 상냥한 목소리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무런 대답없이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숨을 죽이고- 그 바람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서연?"
대답없이 멈춰버린 그녀를 의아한 듯 바라보면서, 앞서 걷던 꿈 같은 사람은 다시 한 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
그 사랑스러운 재촉에 서연은 다시 고개를 들어 천천히 눈을 뜬다.
자신을 부른 그 사람이 아직도 제 앞에서 사라지지 않았음을 몇 번이고 확인하면서, 그녀는 그제서야 부름에 응한다.
"네, 스승님."
[산책]
by. 칡즙
“힘이 들면 조금 쉬었다 갈까?"
비월은 걸음을 되돌려 서연에게로 한걸음 다가왔다. 손을 뻗어 그녀의 새카만 머리카락의 끝자락을 가볍게 어루만진다. 많이 컸구나. 예전같이 손이 닿지 않는걸. 비월은 아쉬운 듯이 중얼거렸다.
“...괜찮습니다, 스승님.”
서연은 그런 그녀의 태도가 조금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세월이 흐르고 그 자그맣던 소녀는 이제 제 스승을 내려다볼 정도로 키가 자랐지만, 비월의 눈에 서연은 아직도 처음 만났던 그 때의 그 모습 그대로인 모양이다. 마주 오는 올곧은 시선을 받아내기가 차마 벅차 시선을 흘린다. 어딘지 모를 산중의 한적한 언덕길. 인적은커녕 산짐승의 기척조차 찾을 수 없는 고요한 이 공간에 서연은 감사했다. 그녀는 한 나라의 태사였고, 비단 그것 뿐만이 아니더라도 누구든 능히 다룰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하찮게 보일 것이며,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렇기에 이렇게 누군가를 앞에 두고 대답을 망설이고, 다정함에 곤란해하며, 그럼에도 그 존재에 안도하는 자신의 모습을 다른 이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 요사스러운 마족 여자라면 분명 ‘진서연님, 기분 나쁘게 그게 뭐에요?’ 라며 옆에서 한참을 비웃어 댈 것이다. 흥, 기분 나쁜 건 언제나 네 쪽이지. 악담과 함께 코로 웃어 넘기면서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면, 자신의 스승은 어느새 옆에 있는 납작한 바위 위에 앉아 가을 바람에 땀을 식히고 있었다. 앉아있는 바위의 한 켠은 딱 한 사람 분이 비어있었다. 서연은 문득 울고 싶다고 느꼈다. 어째서일까.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그 세월동안 쉬임없이 깎여나가면서 이제는 한 줌의 추억조차 남지 않았을텐데. 서연은 변했다. 비월이 알던 그 어릴 적의 서연의 모습은 이제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변해버린 것은 되돌릴 수 없다. 죽은 사람은 돌아올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바람이 좋은 곳이다. 쉬어가기에 적당하겠지.”
그런 당연한 이치를 어째서 이 사람은 이리도 가볍게 뒤집어 버리는 것인지.
“그렇군요.”
서연은 비월이 비워놓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어깨가 닿아 가볍게 느껴지는 체온에 꼿꼿하게 힘이 들어가 있던 자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서연은 그제서야 아직까지도 자신의 몸이 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월은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경관도 이리 아름답구나. 그렇지 않니?”
스승의 말에 따라 서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하사절의 검선은 많은 사람에게 사랑과 찬사를 받으며 살아왔지만, 사실은 고요하고 인적이 드문 곳을 좋아했다. 사람이 사는 마을보다는 수풀로 둘러싸인 산 속을 좋아했다. 자신을 칭송하는 사람들 앞에서보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들 앞에서 더 부드럽게 웃었다. 스승님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것일까. 어린 서연의 질문에 비월은 말없이 미소만을 지어보였다.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작은 제자를 향해 비월이 말했다.
서연아. 그리 걱정할 것이 없다. 나는 네가 좋구나.
그것만으로 소녀는 더 이상의 근심과 걱정을 잊었다. 스승의 한 마디는 언제나 서연의 세상을 바꾸었다.
“그렇습니까.”
서연은 사실 ‘절경’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빼어나고 수려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경치도 서연에게는 아무런 감동을 주기 못했다. 그저 산이 있고, 시내가 흐르고, 나무와 풀이 우거져 있을 뿐이 아닌가. 스승을 잃은 후 이 땅은 어디든지 똑같은 풍경이다.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추악함만이 가득하다. 스승이 있던 시절의 경치는 이미 오래전에 잊었다. 그러니 더 이상 이 세상의 어디를 가더라도 아름답다 느끼지 못할 것이다.
“스승님이 그렇다고 말씀하시면, 필시 그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연은 지금 스승과 함께 둘러보는 이 경관을 아름답다고 느꼈다. 바로 방금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감흥이 없던 이 주변이, 스승의 ‘아름답다’는 한마디에 생동감이 흘러넘치는 지상의 낙원으로 변모한다. 그녀에게 있어 이 세상은 어떠한 의미도 갖지 못한다. 하지만 비월이 그 세상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비로소 서연에게도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후후.”
“...어찌 웃으십니까?”
“너도 이제 다 컸구나. 그런 겉치레 같은 말도 할 줄 알고.”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제 마음을 읽힌 것 같은 기분에, 서연은 결코 튀지 않는 목소리로 천천히― 하지만 몇 번이고 말을 반복하며 대답했다. 이래서야 제 발이 저려 변명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지 않는가. 스스로 생각해도 참으로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하며 서연은 쓴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처음에 비월이 저를 대하는 그 태도에 느꼈던 위화감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단단하게 굳어진 자신의 오랜 습관과 태도들이, 극히 자연스러웠던 자신의 모든 것이 기억에서 스러진다. 그녀를 만난 지 단 수 분 만에 일어나는 기적이다.
“여생을 이런 곳에서 보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스승님은 경관이 좋은 곳에서는 늘 그러십니다.”
“너는 아직 어리니 이 마음을 알 리가 있겠느냐.”
“그렇습니까... 저도 이제 어린아이가 아닙니다만.”
“후후. 자신이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아직 어린아이라는 것이지.”
비월의 눈동자가 서연을 향했다. 남들은 서리가 내린다고 하였건만, 서연에게 그녀의 시선은 늘 봄날의 햇살처럼 눈부시게 따스했다. 비월은 손을 뻗어 서연의 차가운 볼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저를 가련히 여기십니까.
서연은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지금 그녀에게 물어도 돌아오는 것은 분명 변하지 않는 미소 뿐이리라.
“사람들이 싫으냐.”
“...”
“좋아하는 마음도, 미워하는 마음도, 지나치면 결국 스스로가 지치게 되는 법이란다.”
“......”
“너에게도 숨을 돌릴 곳이 필요하지 않겠니.”
서연은 가볍게 숨을 삼켰다. 다음에 나올 비월의 말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깨달아버렸다.
“나와 함께 살자.”
그것은 서연에게 있어서 아마도 평생의 염원이었던 것. 흐려진 기억 속에 이미 잊혀져 버렸음에도 몸이, 마음이, 가슴의 한 켠이 뜨겁게 그 감각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서연은 나직하게, 하지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서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단호한 거절에 비월은 놀란 눈을 하며 서연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그리운 얼굴을 찬찬히 어루만지면서, 서연은 너무나도 오래동안 울어 조금의 물기도 남아있지 않은 듯한 바싹 마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스승님은―, 당신은, 이미 제 곁에 없으니까.”
많은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녀와 함께할 수 있다면 어떠한 부귀도 영광도 필요없었다. 그런 단 하나의 염원을 가차없이 세상에 빼앗겼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나 있을까. 꿈을 꾸어도, 그 꿈에서 기적이 일어나도, 영혼이 그 절망을 확연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렇기에 서연은 늘 알고 있다.
그 바램은 이제는 영영 이루어질 수 없다.
“서연아.”
“당신은 이미 이 세상에 없지 않습니까.”
맞닿았던 어깨에 남아있던 체온이 산바람에 금세 차갑게 식는다. 스멀거리면서 자신의 몸 안에 그득한 탁기가 배어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서연은 비월의 얼굴을 쓸어내리던 제 손을 황망히 거두었다. 설령 환상의 존재라도 이런 몸을 그녀에게 닿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녀는 제가 알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비월 그 자체니까.
어때요? 효과가 좀 있나요? 유란은 방 안의 문갑 위에 버릇없게 걸터앉으면서 킥킥 웃음을 흘린다. 쓸데없는 짓을. 서연은 대답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코를 울려 한 번 비웃음을 흘린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라라.”
마치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서연을 보며 유란은 어깨를 한번 으쓱거린 후 ‘한 시진 후에는 시찰이 있으니까 준비하시지요, 진태사님.’ 하고 끈적거리는 전언을 남긴 후 자취를 감추었다.
“흥. 어쩐지 잠자리가 좋지 않다 했더니.”
저런 것이 방 안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그것도 당연하지. 서연은 갑주를 챙기면서 오늘의 일정을 머리 속에 되뇌였다. 오늘도 바쁜 하루가 될 것이다. 채비를 마친 후 한 켠에 놓여있는 귀천검을 향해 손을 뻗는다.
“...”
귀천검을 잡는 순간에는 항상 차가운 청량감이 쥐고 있는 손 언저리를 감돈다. 마치 제 안에 있는 짙은 탁기를 밀어내려는 듯한 그런 느낌에 서연은 가볍게 혀를 찼다. 고개를 돌려 방의 한 구석, 유란이 서 있지 않던 다른 침대 맡을 이끌리듯 바라보았다.
“...”
눈에는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남아있는 것은 공기에서 느껴지는 아주 미약한 온기 뿐이다. 그러고보니 맨 처음 환각에 시달릴 때에는 꽤 분명한 형태로 나타난 그녀가 저를 괴롭혔었던 것도 같다. 몇 번을 무시하는 동안 천천히 그 환각을 보는 일도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각오가 부족한 것인지 종종 이렇게 정신이 흐려질 때가 있는 것이다.
“아직도 포기하지 못하셨습니까.”
서연은 알고 있다. 그것은 비월의 의지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저의 안에 남아있는 어리석음이다. 혹시 그녀가 살아있다면, 이런 모습을 보고싶지는 않아 하실 텐데. 그런 어처구니 없을 정도의 물러터진 희망이 흘러나온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저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환각을 보는 것을 완전히 멈출 수는 없었지만, 서연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비월은 이제 어떻게 해도 서연을 막을 수 없다. 꿈에서처럼 말을 거는 것도, 곁에 앉아 다정한 손길로 어루만지는 것도― 서연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조차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