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
by. 칡즙
오전 수련을 막 마친 수련채의 마루바닥에 창틈 새로 쏟아진 햇살이 흩어졌다.
“......”
달그락, 달그락.
수련을 마친 제자가 구석에서 목제 가검을 정리하면서 내는 소리가 싱그럽게 가슴 속에 퍼져나간다. 열린 문 틈으로 조심스레 들어오는 산들바람에 땀을 식히며, 비월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수련채의 문이 활짝 열려 있음에도 그다지 소란스럽지는 않다. 가택의 뒷채에 자그맣게 마련되어 있는 이 곳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안채와는 거리가 제법 있기 때문에, 어지간한 소동이 없는 한 늘 적막한 편이었다.
달그락, 달그락.
이곳에는 서연과 비월 외에는 거의 아무도 출입하지 않는다. 본디 이 수련채는 비월 혼자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다른 천하사절의 일원들이 자신의 무공을 연마하는 데에는 그리 마땅치 않은 모양이었다. 세간이 소란스러워지면서 차분히 수련에 임하는 시간도 나날이 줄어들면서, 비월 스스로도 이 곳을 찾는 일도 거의 없어졌다.
달그락, 달그락.
그렇게 고요히 먼지만 쌓여가던 작은 공간이 비월이 서연을 들인 후부터 다시금 활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제 안의 어딘가에 잊혀졌던 무언가가 다시금 떠오르는 그런 감각이어서, 비월은 최근 들어 서연과 함께 보내는 이 시간이 조금씩 즐거워졌다.
“......”
비월은 감았던 눈을 뜨고, 멀찍이 있는 제자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주변의 공기가 가볍게 살랑이면서 가슴 속까지 스며들어 부드럽게 그녀의 마음을 간질인다. 내면에서부터 서서히 따뜻한 감각이 퍼져나간다. 조금씩 저도 모르게 미소가 배인다. 아마도 ‘사랑스럽다’라는 감정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어라, 그러고보니...’
그렇게 자신의 어린 제자를 바라보고 있던 비월은 무언가를 눈치챈 듯 가볍게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서연아.”
“!!”
가만히 흘러나온 비월의 목소리는 들릴 듯 말듯 나직하고도 부드러웠지만, 어린 제자는 깜짝 놀라 파드득 뛰어올랐다. 그 반응에 비월도 놀란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허둥허둥 서연에게로 향했다.
“다친 곳은 없니?”
“아, 네. 네. 죄송합니다.”
갑작스레 불려서 그만― 서연은 방금 전 자신의 행동이 조금 부끄러웠는지 눈을 살짝 내리깔고 새침한 표정으로 변명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어린 제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얼굴색을 고치며 평소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돌아와 자신을 부른 스승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스승님?”
이제는 제법 자란 그녀를 보며 천하사절의 동료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귀염성이 없다는 둥, 제 스승을 꼭 빼다 닮았다는 둥 투덜거리면서 혀를 차곤 했다. 제 스승을 닮아서인지, 아니면 타고난 성품이 그런지― 서연은 한밤중에 고요하게 흐르는 11월의 잔잔한 개울물 같았다. 달빛을 그러안은 맑고 시린 물가에는 행여 그 청아함을 흐릴까 함부로 다가가기가 어려운 법이다. 확실히 서연에게는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들다운 애교나 어리광이 없었다. 해가 갈수록 사람들은 서연과 가까워지기는 것을 어려워했고, 서연도 딱히 그런 주변의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서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마다의 차이가 아닌지. 그렇게 말하는 비월에게 환귀 익산운은 ‘자식의 재롱을 보고 싶어하는 애비의 마음 같은 것 아니겠냐’라며 못마땅한 듯 서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그의 눈가에 진심으로 소녀를 비난하는 기색은 없다. 서연을 데려오는 것에 가장 탐탁치않아 하던 익산운조차도, 그 귀여운 구석 하나 없는 소녀를 위해 종종 장터에서 곶감을 사오거나 하는 것이다.
세속과의 정을 끊고 살아온 우리들은, 어쩌면 그 덕에 더욱 정에 더 이끌려버리는 것일지도 몰라.
오래 전부터 들어왔던 익산운의 그 말을 떠올리며 비월은 처음으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스승님?”
“...”
아무런 말 없이 그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비월을 보며 서연은 다시 조심스레 제 스승을 불렀다. 소녀의 눈동자는 평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조심스레 불안한 기색이 엿보인다. 신기하게도 언제부터인가 비월은 서연의 눈빛에 배어나는 감정을 저도 모르게 알게 되었다. 서연의 속내는 어쩌면 다른 소녀들만치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여자아이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약한 모습을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하는 점이 오히려 더 아이답고 귀엽다고 생각하며, 비월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서연은 그런 스승의 내심을 도통 짐작치 못해 당황스러운 듯 눈을 깜박였다.
“...?”
“역시, 키가 많이 자랐구나.”
비월은 다시 한 번 찬찬히 서연을 훑어보면서 말했다. 멀찍이서 봤을 때도 그랬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살펴보니 확실히 알 것 같다. 서연은 비월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소매 끝을 바라보았다. 소맷자락이 짧아 팔목이 빠끔히 드러나 있었다. 성장기에 접어든 것인지 최근의 서연의 모습은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고 있었다. 한참이나 내려다보아야 했던 작은 아이는 어느새 비월의 턱 끝 언저리까지 키가 컸다.
“옷을 다시 맞춰야겠는걸.”
“...죄송합니다.”
서연은 평소보다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비월은 쿡쿡 소리를 흘리며 웃는다.
“무엇이 그리 죄송하느냐.”
“앗, 그건...”
“커야할 시기에 제대로 크고 있다는 건 좋은 것이 아니냐. 때를 놓치면 나중에는 자라고 싶어도 더 자라지 못하는 법인데.”
“그렇지만―”
서연이 입고 있는 옷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것들이었다. 얼마 전 홍석근이 장터에 들렀다가 적당한 것을 골라왔다면서 가져온 것이다. 처음에는 서연의 옷차림에 천하사절의 모두가 그렇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에 익숙치가 않기에 비롯된 무신경함일 것이다. 그래서 서연은 그저 주변에 구할 수 있는 것을 그대로 가져다 입었다. 집안에는 아이를 위한 옷이 없었기에 보통 가택에서 일하는 시동들의 옷을 입었다. 때로는 근처의 절에서 얻은 승려복을 입을 때도 있었다. 남자아이의 옷도 맞는다면 가리는 일 없이 입었다. 그것조차 서연은 깊은 감사를 표하며 받았고, 필요 이상의 여벌은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천하사절을 찾아오는 사람 중 하나가 몸에 전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다니는 서연을 보고 옷 몇 벌을 지어다 선물해 주었다. 그것을 보고서야 천하사절들도 장터에 나갈 때 겸사겸사 서연의 옷가지들을 사서 돌아오기 시작했다. 서연은 그것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괜스레 쓸데없는 것에 스승과 그 동료들을 신경을 쓰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비월은 서연의 이마를 가볍게 콕 찌르면서 핀잔을 주었다.
“뭘 그리 신경 쓸 일이 많느냐.”
“...”
“아이면 아이답게 어른이 주는 것을 감사히 받으면 그만인 것을.”
그것이야말로 아이의 특권 아니겠느냐. 비월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연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앳딘 소녀의 티를 벗으면서 서연-익산운이 일컫기를 ‘사춘기’라고 했다-은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 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것을 알면서도 비월은 지금 서연의 머리를 그렇게 쓰다듬어 주어야만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네.”
서연은 머뭇거리면서도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아직 어리더라도 서늘하고 단호한 태도의 그녀는 함부로 다가서기 힘든 한 마리의 고고한 이리 같았지만, 비월에게만은 여직도 유순한 새끼 양과도 같았다. 그녀에게 있어 비월은 단순한 검술의 스승이 아니었다. 첫만남에서부터 생명을 구했고, 지금도 그녀의 생명을 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녀의 생명을 구해갈 것이다. 그렇기에 비월은 서연의 생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비월은 자신에게 지워지는 그 무거운 한 아이의 의지가 그리 괴롭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종종 가슴을 한가득 뿌듯하게 채우는 벅참을 느낀다. 곁에서 듣던 무신 천진권은 ‘보람차다는 말을 어렵게도 하는군’ 이라며 혀를 찼다.
“그럼, 식사 후에는 함께 장터에 나가보자.”
“네?”
“여자아이의 옷을 계속 사내들에게 고르게 하는 것도 탐탁치 않은 일 아니냐.”
비월은 옷감은 좋지만 영 센스가 좋지 않은 서연의 옷을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어머나, 검선님 오셨습니까?”
이 근방에서 가장 옷을 잘 한다고 소문이 난 가게의 주인이 비월의 방문에 버선발로 달려나왔다.
“비월님이 여기까지 행차를 다 하시다니, 드문 일이네요. 무슨 바람이 부셨을까?”
싹싹한 태도의 젊은 여주인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비월을 맞이하다가,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서연을 보고서는 샐쭉 입술을 끌어당기며 웃는다.
“아하, 작은 아가씨 옷 한 벌 해주시려고요?”
여주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다고 대답하는 비월과 아무 말 없이 그 뒤에 서 있는 서연을 번갈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는다. 어쩜, 사이도 좋으셔라. 미인 두 분이 이렇게 나란히 걸어다니니 우리 집 비단결이 기가 죽겠네. 어서 들어와요. 얘들아, 손님 모셔라. 여주인은 시동들과 함께 두 사람을 가게 안으로 안내했다.
“...”
서연은 주변에 온통 한가득 쌓여있는 형형색색의 옷감들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접하는 풍경에 절로 호기심이 새어나오는 그 표정은 영락없는 또래의 여자아이의 것이었다. 탁기에 한 번 침투당했던 서연의 몸은 함부로 밖을 돌아다니기에는 아직 위험했다. 하지만 저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종종 이렇게 밖으로 나오는 것도 아이에게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비월은 생각했다. 시동들은 서연의 치수를 재기 위해 준비를 서둘렀고, 여주인은 가게에서 가장 좋은 옷감들을 꺼내었다.
“그래, 어떤 색이 마음에 드시는지요?”
“네?... 아...”
주인의 질문을 받은 서연은 난감한 듯 안색을 흐리면서 대답을 망설였다. 한참 후에야 ‘무엇이든 괜찮습니다‘ 라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러고보면 서연은 무언가를 먼저 바라거나 요구하는 적이 없었다. 비월이 들었던 서연의 어리광은 기껏해야 검을 배우고 싶다는 요청 정도였다. 참으로 욕심이 없는 아이였다.
“으음, 이것 참... 뭐든 잘 어울릴 것 같으니 나도 참 고민이네. 비월님이 보시기엔 무엇이 좋을 것 같나요?”
“네?”
질문의 화살이 저에게로 돌아오자 비월은 놀라서 반문했다. 이런, 이렇게 되면 서연처럼 회피할 수도 없다. 비월은 내놓아져 있는 고운 옷감들을 찬찬히 쳐다보았다. 알록달록하게 화려한 색들 사이에서 정갈하고 하얀 옷감에 눈이 멎는다.
“이것은 어떻습니까.”
“역시 검선님! 고상하신 안목이십니다.”
여주인은 호들갑을 떨면서 비월이 고른 옷감을 들어보였다. 이게 척 보기에는 화려한 맛은 없어보일지 몰라도 차분하고 기품이 있어서 많이들 찾는답니다. 그녀는 치수를 재는 시동들에 둘러싸여 딱딱하게 굳어있는 서연의 몸에 그 옷감을 대보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작은 아가씨는 피부도 하얀 백옥과 같으니, 이 비단으로 옷을 지으면 마치 태어날 때부터 입고 나온 양 잘 어울릴 겁니다.”
“그렇다는구나.”
비월은 여주인의 과장 섞인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서연을 바라보았다. 서연은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선 채로 난감한 듯 시선을 떨굴 뿐이었다.
“그나저나 몇 년 전 찾아 뵈었을 때에 비해 많이 자라셨는걸요.”
“그러고보면 서연이의 옷을 처음 지어주신 것도 주인장이셨지요. 감사하고 있습니다.”
비월이 예를 갖추어 인사하자 주인은 손을 내저으면서 발랄한 웃음을 터트렸다.
“어휴, 별 말씀을. 저야 옷 만드는 게 그저 천직인 사람이니까, 제가 좋아서 만든 것 뿐이랍니다. 이렇게 예쁜 사람을 보면 창작욕이 막 솟구친다니까요.”
여주인의 말에 비월은 서연을 다시 한 번 찬찬히 훑어보았다. 길게 뻗은 팔다리와 늘씬한 몸, 칠흑같이 검고 비단같이 윤이 흐르는 머릿결과 그에 더욱 대조되는 하얀 피부, 해가 갈수록 절세의 미색을 갖추어가는 이목구비는 종종 지나치는 또래 사내아이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그런 소년들의 감탄을 비월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보석을 조각해 내었길래 저리도 아름다울까. 그녀 역시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소녀를 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는 했다.
“정말 잘 컸어요. 앞으로도 더욱 기대되구요.”
여주인이 황홀한 듯이 흘려냈던 말에 비월은 절실히 공감했다. 이 아이는 앞으로도 계속 미목수려하게 성장할 것이다. 비월은 이 어여쁜 아이가 그게 걸맞은 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세상이 좀 더 아름다운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새 옷을 짓기 위한 대금을 치룬 후 가게를 나왔다. 옷은 완성 되는대로 바로 가져다 드리겠노라고 했다. 기왕 장터에 나온 김에 이것저것 구경하며 돌아다니다보니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있었다.
“장터 구경은 재미있었느냐.”
비월은 제 옆을 따라 걷는 서연에게 물었다. 서연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에게 있어서 첫 장터 구경이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그녀에게 있어서는 처음 보는 것들 뿐이었겠지. 영특한 어린 제자가 유일하게 욕심을 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배움이었다. 새로이 접하는 환경을 익히고 받아들이느라 정신이 없던 하루였을 것이다.
“기회가 되면 종종 함께 나오자.”
“......”
비월의 제안에 바지런히 옮기던 서연의 발걸음이 멈칫한다. 그 반응이 의아한 듯 비월은 멈춘 그녀의 제자를 돌아보았다. 대답을 망설이는 서연을 보며 비월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
“마음이 내키지 않느냐?”
“아, 아뇨! 그런 것이 아니라...”
서연은 깜짝 놀라 손을 내저으면서 황급히 대답했다.
“스승님께선... 이렇게 밖에 나오시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시지 않습니까.”
“...!”
그런 것까지 신경쓰고 있었을 줄이야. 비월은 엷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확실히 서연이 말하는 그대로였다. 비월은 사실 장터에 나오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이 많고 번잡한 곳보다는 조용한 곳을 좋아했기 때문에, 장이 서는 날 나서는 것은 보통 비월을 제한 천하사절의 다른 동료들이었다. 그러고보니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흘끔흘끔 제 눈치를 보았던 것도 그 탓이었나. 그 마음 씀씀이가 한없이 사랑스러워 비월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렇구나.”
사람이 많은 곳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비월의 말에 서연은 숨을 삼켰다. 그런 그녀의 볼을 손 끝으로 쓸어주면서 비월은 장난스레 웃는다. 너는 기적이다. 살만큼 살아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었다고 여겼던 나에게 늘 새롭다. 비월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그 작은 기적에 감사하며 눈을 감았다. 스치는 바람이 기분이 좋아 절로 미소가 배인다. 장터 나들이를 하는 내내 느꼈던 기분을 되새겨본다.
“하지만 너와 함께라면 나쁘지 않을 것이다.”
'행복하다'라는 건─ 분명 지금의 이 감정을 일컬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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