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6 퍼오인 전력글.
전력 날짜는 05.02였지만... 문득 써보고 싶은 소재가 생각나서 헤헤
//15.05.09 1차 수정
피크닉
칡즙
"완전 봄이네."
철창을 열고 들어온 한아름의 꽃다발이 말했다. 아니, 루트가 말했다.
"좋네."
의자 위에 길게 다리를 펴고 앉아 베어의 턱을 긁어주던 쇼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응? 꽃 좋아해, 사민?"
"그래, 그 꽃다발이 네 얼굴을 완전 가려주고 있다는 점이 정말 좋은걸."
"이번 위장 직업은 플로리스트였거든. 오늘부로 관뒀지만."
"손 내리지마, 얼굴 보이니까."
"퇴직기념으로 선물을 좀 가져왔지. 자기가 맘에 들어하니 기뻐."
"두 사람 지금 전혀 대화가 안되고 있다는 거 알고 있는거지?"
건너편 책상 앞에서 지난 넘버 관련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리스가 진저리를 내며 끼어들었다. 평소라면 두 사람의 대화를 적당히 무시했을 그로서는 별일이었다. 의아한 듯한 두 여자의 시선에 잠시 침묵하던 그는 결국 포기한 듯 어깨를 늘어트리며 파일을 책상 위로 내던졌다.
"서류 작업은 서에서만 하는 것도 충분한데. 지긋지긋하군."
"불쌍한 존. 그러고보니 당신 주인은 어디갔어?"
"나는 누군가를 주인으로 모실 정도로 구시대적인 종속 관계를 맺은 기억은 없는데."
"......"
"...하지만 핀치라면 잠깐 외출했어."
거기 앉아계신 분이 일주일 치 비상식량을 전부 먹어치워버렸거든. 리스는 던져버린 파일을 다시 주섬주섬 주워 모으면서 턱을 들어 쇼를 가리켰다.
"그게 고작 일주일치라고?"
쇼는 눈을 찌푸렸다.
"다들 뭘 먹고 사는 거야? 전부 슈퍼모델 선발대회이라도 나갈 셈인가?"
"나가게 된다면 난 자기를 찍어줄께."
"고마워. 답례로 너도 찍어주지, 내 힐 굽으로."
"오늘따라 한 층 더 냉정하네, 자기. 무슨 일이야?"
"오, 네 말대로 빌어먹을 봄이거든."
쇼는 옆에 놓인 장난감 공을 휙 집어던지면서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공을 따라 부리나케 뛰쳐나가는 베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지친듯이 의자 위에 길게 드러누웠다.
"봄 신상라인이 새로 나와서 날 들들 볶고 있다고. 이 백화점 언제 망하지?"
"자기의 그 성실한 근무태도에 백화점도 기뻐할거야."
".............."
대답없이 자신을 짧게 째려보고 고개를 돌리는 쇼를 한 번,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의욕없이 종이를 뒤적거리는 리스를 한 번 바라본 루트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입을 열었다.
"OK, 어떤 상황인지 잘 알겠어."
"말하지 마, 루트. 목소리 듣는 것도 짜증나."
"한가해 보이는군, 루트. 밤산책이라도 나가보는 게 어때, 혼자서."
"요컨데 모두들 지쳐있다는 거지."
"...닥치라는 말을 못 알아들은 것 같은데."
"...꺼지라는 말도 못 알아들은 것 같군."
"힐링이 필요한 시점이야."
루트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쇼가 누워있는 의자로 거침없이 다가갔다. 그녀는 쇼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피하면서 생기는 빈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으면서 바닥에 꽃다발을 적당히 던져버리곤 즐거운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피크닉이라도 갈까?"
"루트. 피곤하면 집에 가서 쉬어. 헛소리 하는 걸 보니 열이라도 있는 모양인데."
"걱정해 주는거야? 역시 자기밖에 없어."
루트의 뜬금없는 제안에 쇼는 짜증을 냈고, 루트는 넉살좋게 받아넘기며 엉겨붙었으며, 쇼는 잇새로 앓는 소리를 흘리면서 그녀를 신발 신은 발로 밀쳐냈다. 거 참 사이좋군. 뜻 모를 적적함을 느끼면서 리스는 영혼없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뚱하니 바라보았다. 끼잉, 발치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숙였다. 공을 물고 온 베어가 반짝이는 눈으로 갑작스레 바빠진 쇼 대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베어의 입에서 공을 뺏어 다시 멀찍이 던지면서 리스는 생각했다. 피크닉이라. 그런 산들산들한 봄바람을 품은 단어를 입에 올려본지가 얼마나 되었더라. 그는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골치 아픈 서류더미와 방금 전 루트의 입에서 흘러나온 꿈결같은 단어를 두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피크닉이라."
의외로 고민은 길지 않았다.
"피크닉에는 뭐가 필요하지?"
리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질문에 쇼는 안타깝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존. 도피하고 싶은 건 알겠는데 이런 미친 여자 말에 동조해주면 안돼. 버릇 나빠진다고."
"조금 정도는 괜찮겠지.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미친 사람들은 너무 무시당하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니까."
"...그래, 두 사람 다 날 생각해 주는 것 같아서 기쁘네."
대답하는 루트의 목소리는 살짝 맥이 빠져 있었지만, 또 금새 언제 그랬냐는 듯 부담스러울 정도의 활기로 가득 들어찼다.
"자. 그럼 아까 존이 말했듯이, 피크닉에는 뭐가 필요할까?"
"...총?"
"샘. 위장용 피크닉 말고 보통 사람들이 가는 일반적이고 평범한 피크닉을 말하는 거야."
"그럼 일반적이고 평범한 사람한테 물어보던가."
쇼는 과도하게 안쓰럽다는 표정과 상냥한 말투로 대답해주는 루트를 노려보면서 대답했다. 루트는 실실 웃음을 흘리면서 리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일단은 장소겠지? 봄이니까 꽃이 많이 핀 곳이 좋을텐데."
"안타깝지만 지금 우리는 여유롭게 꽃이 만개한 피크닉 명소를 찾아다닐 만큼 자유로운 처지들이 아니지 않나?"
안심하고 놀 만한 공간은 기껏해야 이 지하철 바닥 정도지. 리스의 현실적인 판단에 쇼는 코웃음을 쳤다.
"꽃밭이라면 이 싸이코 머리 속에 들어있는 것 같으니까.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쪼개볼까."
"핀치가 돌아왔을 때 마리화나와 양귀비가 가득한 꽃밭을 보여주긴 싫은걸. 그는 섬세한 사람이야."
루트는 리스의 절반의 동의와 절반의 만류로 이루어진 말에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존 말이 맞아."
그리고 쇼의 머리에 콩, 하고 자기 이마를 부딪히고는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모두 앞에선 참아줘. 내 숨겨진 부분은 자기한테만 보여주고 싶으니까."
"아, 시발. 말을 말아야지."
"아쉬운 대로 이걸로 대체하면 어떨까."
루트는 옆에 던져놓았던 꽃다발을 들어 흔들어보이면서 말했다. 그 움직임에 맞추어 희미하게 꽃향기가 흘러나왔다. 퀴퀴하고 약간 습한 지하의 공기가 살짝 가시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거의 기분탓이었지만.
"그 다음엔 뭐가 필요하지?"
루트의 질문에 이어지는 것은 정적이었다. 안타깝게도 피크닉을 가자고 한 발화자를 포함한 이 세 명은, 하나같이 햇살 아래 봄 맞이 피크닉을 즐기는 일반적이고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감성과는 거리가 멀거나, 멀어져버렸거나, 혹은 아예 있지도 않았기에 마땅한 대답을 바로 꺼내지 못하고 지지부진하게 어색한 침묵을 이어갔다.
요컨데 모두가 지쳐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가끔은 이런 쓸데없는 짓에 골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계절을 바야흐로 꽃이 피는 봄이었으니까.
"돗자리."
리스가 먼저 운을 떼었다.
"애완견도 데리고 나가지, 보통."
쇼도 퍼뜩 생각난 듯 받아쳤다.
"애완견 쪽은 충분하네. 셋이나 있으니까."
루트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면서 대답했다.
"적당히 해, 루트. 네 발로 기어다니게 만들어버리기 전에. 여기엔 해롤드가 키우는 개 두 마리 밖에 없어."
"...쇼. 루트한테 뭔가 질 나쁜 것이 옮은 것 같은데. 농담센스 같은 거."
"망할."
"사이좋아 보이네."
사이 안좋아! 쇼는 이를 갈면서 리스의 말을 받아쳤다. 그리고 동시에 이어지는─ 무언가 바닥에 쓸리는 소리에 세 사람은 말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베어가 돌돌 말려있는 커다란 비닐조각을 입에 물고 귀를 늘어트린 채로 서 있었다. 말려있는 모양새는 잔뜩 흐트러진 데다가 가운데가 부자연스럽게 부풀어 있었다. 아무래도 공이 비닐 안 쪽으로 깊게 들어가버린 모양이었다.
"이런, 내 귀요미가. 이리 줘봐."
쇼는 자리를 박차고 베어에게로 튀어나갔다. 낑낑거리는 베어의 입에서 비닐뭉치를 뺏어 주섬주섬 풀어헤치는 쇼의 뒷모습을 보면서 루트가 조금 부러운 듯 중얼거렸다.
"가끔은 개로 태어나고 싶네."
"...네 발로 걷는 연습이라도 해보지 그래?"
"으음. 다리의 문제는 아닐거라고 봐, 존. 내가 네 발로 걷고 베어가 두 발로 걸어도, 쇼는 베어를 선택할테니까."
"잘 아는군."
"뭐. 지금은 말이지."
아니.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데. 리스는 눈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루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루트는 그 시선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과장되게 동그랗게 떠보였다. 그리고 다시 쇼에게로 시선을 돌리다가, 이번에는 정말 놀란 듯 한쪽 눈을 찡그렸다.
"잠깐. 그거 돗자리 아냐?"
"아, 진짜네."
루트의 말에 쇼 역시 뒤늦게 자기가 펼친 비닐 시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다지 큰 사이즈는 아니었지만 성인 서너명 정도가 어떻게든 올라앉은 정도는 되어보였다. 베어는 바닥에 반쯤 펼쳐져 있는 돗자리 위로 성큼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그 미끌미끌한 감촉이 마음에 들었는지 공을 입에 문 채로 돗자리 위에 이내 몸을 눕혔다. 쇼는 그런 베어가 귀여워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옆에 바싹 붙어앉아 등을 슥슥 쓸어내렸다.
"즐거워 보이네, 쇼."
루트는 흐뭇하게 웃음을 흘리면서 쇼와 베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제대로 펼쳐지지 않은 돗자리를 완전히 펼치고는 시트와 바닥의 경계에 애매하게 앉아있는 쇼를 허리를 잡아 끌어당겼다. 베어의 폭신폭신한 털에 정신이 팔린 쇼는 한 번 눈썹을 찡그리고 말 뿐, 제법 순순하게 루트가 이끄는 대로 돗자리 위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루트는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리스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어때? 한 명 정도는 더 앉을 수 있을 것 같은데."
"......"
리스는 대답없이 시선을 아래로 내려 아직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파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돌이켜보니 오늘은 하루종일 데스크 업무였다. 간신히 밀린 서류를 끝내고 퇴근해서 와보니 이번에는 핀치가 한아름의 서류를 맡기고 자리를 비워버렸다. 그는 핀치에게만큼은 늘 관대하고 상냥했지만, 오늘만큼은 그에게 반항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낮동안 그렇게 종이뭉치와 씨름을 한 자신은 오늘 더 이상 활자와 교감하지 않아도 될 권리가 있었다. 적어도 내일로 미룰 정도의 권리가. 내일까지는 너무 심한가. 그럼 한 시간만.
"......흠."
리스는 결심한 듯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성큼성큼 지하철 바닥 한 가운데에 덩그러니 펼쳐진 돗자리를 향해 다가갔다. 털썩, 그는 베어의 앞에 주저앉아서 입에 물린 공을 잡고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리스. 베어 뺏어가지 마."
"질투하지 마, 쇼. 너보단 내가 더 베어랑 친한 걸 어쩌겠어."
개 하나와 사람 둘이 낀 삼각관계를 바라보면서 루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으음, 제법 피크닉 같은걸."
근데 뭔가 좀 부족하네. 루트는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런가?"
리스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흥미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리고 동시에 쇼가 아, 하고 퍼뜩 뭔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었다. 루트와 리스, 그리고 베어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쇼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내뱉었다.
"배고파."
"..."
"..."
루트는 그제서야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뭐가 부족한가 했더니... 도시락이야. 제일 중요한 걸 잊고 있었네."
"그건 어쩔 수 없겠는데. 지금 여기에 먹을 거라고는 산소밖에 남아있지 않아. 안 그래, 쇼?"
"그만 좀 투덜거려, 존. 안 그러면 산소까지도 다 먹어치워버릴테니까."
─끼익, 철컹!
묵직하게 철문이 열리는 소리에 와글와글 커지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세 사람과 한 마리는 철문이 열린 쪽으로 빼꼼히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
양손가득 식료품이 든 종이봉투를 들고 휘청휘청 걸어들어오던 핀치가 입을 벌린 채 놀란 생쥐같은 눈을 하고는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다 큰 어른 셋이 바닥에 비닐 조각을 깔고 모여 앉아있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믿기지 않는 듯, 흘러내린 안경을 치켜올리면서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들 뭐하고 계신 거죠?"
핀치의 질문에 셋은 잠시 말없이 눈을 꿈벅이더니, 입을 모아 대답했다.
" " " ...피크닉?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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