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6 퍼오인 전력글.
전력 날짜는... 13일이지만....;3... 근데 쓰다보니 너무 길어져서 어차피 60분 내에 다 못썼을 것 같다.
15.07.06 1차 수정
소녀
칡즙
쇼는 무언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핀치의 연락을 받고, 백화점에 급한 병가를 내고, 눈총을 받으며 뛰어나가 넘버의 생명을 친절하게 구해준 뒤-구해준 넘버가 뭔가 말을 붙여오는 것을 쌩까긴 했지만-, 늦은 밤 금고털이를 하러 나가기 전까지 시간이 비길래 양 손에 중국식 누들을 한가득 사서 지하철로 발길을 옮기는 데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그야말로 평소의 일상 그 자체였다.
비밀 지하철 기지의 철문을 열고 들어서기 전까지는.
"안녕, 자기. 오늘도 완전 내 스타일이네."
넉넉하게 남는 소매단을 걷어붙인 금발의 소녀가 말했다.
"..."
쇼는 무언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와 동시에 한참을 잘못 돌아가고 있는 이 상황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
핀치도 베어도 보이지 않는 텅 빈 지하철.
있는 것은 지하의 돌벽에서 배어나오는 차가운 냉기와─ 처음보는, 하지만 기분 나쁘게도 어쩐지 낯설지 않은 소녀 한 명.
"..."
쇼는 고개를 천천히 기울이면서, 그 나이또래 치고는 팔다리가 길고 키가 제법 훤칠한 눈 앞의 여자아이를 노려보았다. 남의 옷을 가져다 입은 양 사이즈가 한참을 남아도는 옷. 역시 기분 나쁘게도 그 옷은 쇼가 잘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쇼?"
"......"
아니아니, 그럴리가 없지. 쇼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소녀를 바라보는 눈에 힘을 주었다.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칠 그 매서운 눈길도 소녀는 그저 생글생글 웃어넘길 뿐이다. 어깨까지 넘쳐흐르는 머리카락은 색은 좀 더 밝고 화려한 햇빛의 색을 띄고 있었지만, 그 헤어 스타일 또 역시 분명 쇼가 잘 아는 사람의 것... 아니아니, 그러니까 그럴리가 없다니까.
"사민?"
"...................."
하지만 살짝 녹는 웃음기 어린 눈매. 아닌 척 하고 있지만 언제든 올라갈 준비가 되어있는 입술의 끄트머리. 대체 뭐가 잘났는지 항상 자신만만한 표정. 그리고 아까 얼굴을 마주치자마자 내뱉은 재수없고도 익숙한 멘트. 줄어든 겉껍데기만 빼면 저건 역시아니역시─
"....................................................."
인지부조화가 일어날 것 같은 머리를 맹렬하게 굴리면서 무표정하게 굳어있는 쇼를 바라보며 소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혼란스러워하는 자기를 위해 내가 두 가지 선택지를 줄께."
"...일단 해 봐."
"첫째, 저는 루트에요."
"재밌는 농담이네."
"둘째, 저는 당신과 루트 사이에서 태어난 사랑의 결ㅅ"
"네가 루트라고?"
인상을 팍 찡그리며 말을 끊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쇼를 바라보며 루트-라고 주장하는 소녀-는 조금 아쉽다는 듯 입술을 깨물면서 샐쭉 웃었다.
"개인적으로는 두번째를 추천하고 싶었는데 끝까지 들어주질 않네. 매정한 사람."
"웃기지마. 루트."
쇼는 소녀의 앞에 우뚝 선 채로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거칠게 잡아 들어올렸다. 마치 땅에 떨어트린 물건에 긁힌 자국이 생겼는지 확인하듯이 눈 앞에서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그녀의 미간은 분노로 점점 깊게 패여가기 시작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나도 믿기진 않지만 이게 참───"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이 갑자기 사람이 어려지는 이딴 말도 안되는 소재를 어린이날에도 써먹어놓고 또 쓴다는게 말이 돼? 이게 팬픽이라면 진짜 작가 너무 양심도 없는 거 아니야?!"
"...으응, 자기 조금 진정해야겠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못 알아듣겠어."
"핀치! 핀치는 어딨어?"
쇼는 소녀를 팩 밀어버리고는 주머니를 더듬어 핸드폰을 꺼냈다. 빠른 손놀림으로 통화를 연결하는 그녀를 루트-주장하는 바에 따르면-는 다소 주저하는 태도로 만류했다.
"아, 핀치라면 지금 좀 문제가 생겨서..."
"문제? 지금 이거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어디있어?"
삑 ───
통화 연결음과 함께 핀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스 쇼?]
"핀치. 대체 지금 어디에요?"
[아, 중간에 연락이 끊어졌었죠. 죄송합니다. 넘버는 무사한가요?]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거든요? 지금 여기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알─"
[아앗! 잠깐만!! 그리로 가면───!]
와장창!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갑작스러운 요란한 소리에 쇼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핀치? 무슨 문제 있어요?"
쇼의 질문에 핀치는 조금 망설이는 듯 확신이 없는 말투로 운을 떼었다.
[그게. 저... 이걸 믿어주실지는 모르겠지만.]
"말해봐요. 지금의 난 어떤 미친 상황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것 같거든요."
[리스씨가 개로 변해버린 것 같습니다.]
컹컹! 핀치의 황망한 목소리 너머로 기운찬 개의 짖음소리가 들려왔다.
".........................................음."
[미스 쇼...? 그러고보니 무슨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아니, 그 쪽에 비하면 이 쪽 문제는 별 것 아닌 것 같네요. 끊을께요."
[앗, 미스 쇼!! 혹시 바쁘지 않으시다ㅁ────]
삑.
핀치의 다급한 응원요청을 재빠르게 끊어버린 쇼는 손가락으로 폰을 가르키면서 루트-로 짐작되는 그 소녀-를 향해 눈을 크게 떠보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그 눈빛을 읽은 소녀는 눈썹을 끌어올리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좀 늦게 찾아온 세기말 현상 같은 걸지도."
"......지구종말이 이런 형태로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세계가 멸망에 한 층 더 가까워진 모양이다.
◇
그녀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아침에 일어나보니 갑자기 몸이 어려져있었고, 어째서인지 머신과는 연결이 불통이고, 꽤 오랜 시간을 들여 현실을 받아들인 후 다른 사람들에게도 혹시 문제가 생겼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직접 지하철 기지로 오는 도중에 급하게 뛰쳐나가는 핀치와 베어를 보았다고. 지하철로 내려와서 넘버를 구하고 있는 쇼의 모습을 확인하고, 스케줄 상 남는 시간을 때우려 이 쪽으로 오겠구나 싶어서 기다린 모양이다.
"머신에게 문제가 생긴 건 아니고?"
여러가지 조건을 고려해봤을 때 이게 현실이라고 받아들이기로 한 쇼는 여전히 못미더운 눈길로 어려진 루트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루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의 오른쪽 귀 뒤를 톡톡 두드렸다.
"아침에 넘버는 나왔는걸. 아마 내 쪽의 문제일 것 같아."
"상처는 그대로인데."
쇼가 루트의 머리카락을 들추어 그녀의 상처자국을 확인해보면서 눈을 찌푸렸다. 어려진 덕에 한층 더 가늘어진 목덜미와 두상 탓에 흉터가 한 층 더 크게 보였다.
"몸이 줄어들면서 와우의 위치나 조율 쪽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그래? 아프거나 하진 않아?"
"괜찮은 것 같은데. 아직은."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은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길어진다면 일단 와우를 제거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검진은 받아봐야 하는 것 아닌가? 진지한 눈으로 그 상처자국을 살펴보면서 몸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을 가늠하는 쇼를 바라보며 루트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에 쇼는 불쾌한 듯 눈을 찡그렸다.
"뭐야?"
"적응이 빠르구나, 사민. 난 이게 꿈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는데 말이야."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별거 아니라는 듯 툭 던진 쇼의 말에 루트는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뭐야, 또?"
"음, 아냐."
가끔씩 그녀가 던져주는 그 무심한 신뢰는 종종 루트를 설레게 만들었다. 물론 믿지 않을 때가 더 많긴 했지만, 그건 믿지 않아야 하는 상황이 맞으니까 뭐.
"그리고."
"?"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이 루트가 아니라면, 이 세상에 루트 같은 게 두 개나 있는 거잖아. 그건 너무 끔찍하지."
"그 말은 내가 자기한테 있어서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거지? 자긴 참 로맨티스트야."
"이왕 어려질 거면 말도 못하는 갓난아기까지 돌아갔으면 좀 좋았을 것을."
쇼는 지끈거려오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적당히 상황을 인정하고 나니 잊고 있었던 공복감이 갑자기 밀려들어왔다.
"배고프네."
"아, 나도."
곧바로 뒤따라오는 어린 목소리에 쇼는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쇼가 기억하는 루트는 그다지 음식에 집착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나도 아예 밥을 안 먹고 살진 않아. 게다가 오늘은 아침부터 정신없어서 계속 굶었는걸."
아침부터 계속? 쇼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벌써 오후 5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 정도의 공복이라면 배가 좀 고픈 정도가 아니라 이미 죽었어야 했다. 쇼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면서 입을 열었다.
"누들 사 온 게 있으니까 좀 먹던지."
"그 누들이란게 혹시 저걸 말하는 거야?"
루트는 손가락을 뻗어 입구 바닥 쪽을 가리켰다. 아, 설마. 쇼는 엄습해오는 불안감과 함께 그 손끝을 따라 시선을 던졌다.
"...젠장."
바닥에 무참하게 패대기 쳐진 싸늘한 누들 주검들은 이미 회생불능의 상태였다.
"들어오자마자 나랑 눈 마주치고 바로 떨어트렸는데."
"물어내."
"어린애한테 삥을 뜯다니 너무하는 걸, 사민."
불쌍한 척 눈을 치켜뜨는 루트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손이 올라갈 뻔한-아니, 이미 반쯤은 올라간- 쇼는 퍼뜩 제정신을 차리고 이를 갈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무리 루트라도 이건 어린애다. 함부로 때릴 수는 없지. 나중에 원래대로 돌아오면 배로 패버리겠다고 다짐하며 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응? 어디?"
"뭐라도 사 먹어야지."
쇼의 짦막한 말에 루트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이미 출구 쪽까지 걸어나간 쇼를 바라보면서 다시 질문했다.
"나도 데러가는 거야?"
"뭐야, 싫어?"
"사주는 거야?"
"...내가? 너를?"
그렇게 되나? 잠시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껴 고민하고 있는 쇼를 바라보며 루트는 한가지 안을 제시했다.
"책상 위에 해롤드 지갑이 있는데."
"좋아, 가져와."
◇
시가지로 나간 둘은 가는 길에 작은 옷가게에 들러 루트의 어려진 몸에 맞는 옷을 구입했다. 쇼가 잘 알고 있는 핫도그 집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하기로 했지만, 그녀는 그 가게까지 가는 도중에 입이 심심하다며 프레첼 한 봉지, 감자튀김 한가득, 부담스러운 색의 과일음료를 비롯하여 그 외에 이름 모를 가판대 음식을 5개 정도 더 사먹었다. 안 그래도 작은 데다가 어려진 통에 한층 더 줄어든 루트의 위장은 감자튀김을 반절 쯤 해치울 무렵에서 이미 넉다운이었다. 루트는 흘끗 자신이 갖고 있는 해롤드의 지갑을 바라보았다. 거의 텅 비어버린 그 얇은 두께를 보면서 루트는 후회스러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책상 뒤에 비상금도 더 훔쳐올걸."
"벌써 바닥났어? 해롤드도 참 비상시에 어쩔려고 돈을 그거밖에 안 갖고 다닌담."
어쩔 수 없지. 핫도그는 내가 살께. 쇼는 큰맘을 먹었다는 듯 말했고 루트는 정중히 사양했다.
"배불러, 쇼."
"뭐? 그렇게 조금 먹으면 키 안큰다."
"으음. 그것 참 설득력있네."
루트는 기껏해야 자기보다 조금 큰 정도의 쇼를 흘끗 바라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못들은 척 앞서나가던 쇼는 이내 걸음을 멈추고 뒤쳐진 루트를 돌아보았다.
"안 오고 뭐해."
자기가 먼저 앞서갔으면서. 짜증스럽게 찡그리면서 다분히 의무적인 태도로 그녀를 챙기는 쇼를 바라보며 루트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 샐쭉 미소를 흘렸다.
그녀는 소녀의 속알맹이가 루트인 것을 알면서도, 단지 약자의 위치에 있는 어린아이의 몸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내키지 않는 보호자를 자처하고 있다. 루트에게 있어서 그것은 그다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감각이었다. 물론 거기에 감정은 없다. 단순하고도 다소 고지식한, 스스로 확립해놓은 윤리관에서 비롯되는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 하지만 그렇기에 루트는 그것이 참을 수 없이 마음에 들었다. 소시오패스면 어때. 감정이 없으면 또 어때. 그녀는 너무나도 합리적이고, 그렇기에 그 어떤 오류 하나 없이 아름다웠다.
"알았어, 자기."
루트는 쇼의 팔에 다정한 태도로 달라붙어 팔짱을 끼고는, 어린아이 주제에 쓸데없이 과도하게 녹아내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호칭도 그만둬, 멍청아. 내가 소아성애자로 보이잖아...!"
◇
기어코 핫도그까지 다 먹어치운 쇼는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을 발견했다. 아이스크림을 먹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는 그녀를 보며 루트를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속이 울렁거려서 당분간 음식은 모형도 보고싶지 않았다. 옆에서 하도 맛있게 먹으니 따라서 야금야금 먹은 탓에 평소보다 과식해버린 모양이다.
"안되겠어. 혼자 다녀올 수 있겠어, 사민?"
"흠. 그럼 금방 사서 돌아올테니까 여기에서 바람 좀 쐬고 있어."
5분만 기다려. 애를 길바닥에 혼자 버려두는 건 좀 그렇지만, 어차피 네 속에 들어있는 건 시커먼 어른이니까 괜찮겠지. 쇼는 그렇게 말하고는 휑하니 편의점으로 들어가버렸다. 5분이라니. 분명 아이스크림 외의 다른 간식거리도 사먹고 올 속셈이다. 루트와는 다르게 잘 단련된 근육을 유지하기 위한 과도한 열량이 필요하다는 건 이해하지만, 저 정도의 하루 섭취량을 유지할만한 돈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마리탄의 감시 덕분에 지속적인 자금원을 확보하기가 어려운 요즈음, 루트는 쇼에게 두번째 직업이 생겨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거기 꼬마 아가씨."
앞으로 쇼와의 단란한 미래-쇼의 의견은 어차피 좋은 소리가 안 나올 것이 뻔하므로 무시하고-를 위한 자금원 확보 계획에 열중하던 루트는 누군가가 뒤에서 부르는 굵은 목소리에 눈을 찌푸렸다. 단 한마디 뿐이었지만 루트는 그 한마디 만으로 자신을 부른 사람의 속내와 목적, 앞으로 펼칠 수법까지 단숨에 파악해버렸다. 순간적으로 스친 불쾌한 감정을 얼굴에서 지운 채, 루트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세 명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의외로 제법 그럴싸하게 차려입은 사내들이었다. 이런 놈들이 더 속내가 시커먼 법이라는 건 루트는 질릴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이 중 한 명은 특히 마음에 안드는 생김새인걸.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세 명의 얼굴을 차근차근 스캔하며 멀뚱하게 바라보았다. 그 적막한 무반응에 당황하는 두 명과는 달리 리더로 보이는 나머지 하나가 물 흐르듯 유려한 말투로 그녀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기 시작했다. 길을 잃은 게 아니냐. 일행은 없냐. 근처에 경찰서가 있으니 데려다주겠다. 위험한 사람은 아니다. 등등... 루트는 그런 그 말을 흘려들으면서 계속해서 멀뚱하니 그들을 쳐다보았다.
"......"
사람을 물리적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말살하고, 덧붙여서 뒷처리까지 말끔하게 하려면 계획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루트는 그런 방법에 대해 매우 정통했지만, 최적의 방법을 선택하는데에는 언제나 다소 계산할 시간이 걸리는 법이었다. 머신과 연결이 되면 좀 편했으려나. 아니, 그렇지는 않을것이다. 머신의 그녀가 하려는 일에 절대 찬성하지 않을테니까.
"벙어리인가?"
"그럼 오히려 잘됐지 않아?"
음 좋아. 그 방법으로 갈까. 계획을 정리한 루트가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콰장창──!!
말을 걸 상대가 순식간에 반대편 벽으로 튕겨나가 쓰레기통과 함께 처박혀버리니, 입을 열었어도 나올 말이 마땅치 않다. 그래서 루트는 할 말을 잃은 채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갑자기 난입한 익숙한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남의 집 애한테 무슨 수작이야."
쇼는 불쾌한 듯 얼굴을 찌푸리며 아이스크림 막대를 입에 문 채로 웅얼거렸다. 반쯤 들렸다 내려오고 있는 늘씬한 다리는 방금 나가 떨어진 저 남자를 걷어차는 데에 사용된 것이 틀림없었다. 갑작스러운 소동에 주변이 웅성대기 시작하자 아직 두 다리로 서 있는 두 남자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이내 벽 쪽에 처박힌 동료를 챙겨 달아나버렸다. 시시해라. 루트는 아쉬운 듯이 눈으로 그 뒤를 잠시 쫓다가, 고개를 들어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양손에 또 뭔가 잔뜩 사 들고 나온 그녀는 매의 눈으로 마지막까지 부리나케 도망가는 녀석들을 쫓고 있었다. 쇼의 폰에는 세 명의 얼굴이 확실히 찍혀있는 사진이 담겨 있었고, 그녀는 리스의 번호를 찍었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번호를 지우고 대신 푸스코에게로 그 사진을 전송했다.
"..."
어쩐지 속이 울렁거렸다. 그것은 과식에서 오는 거북함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뭐야?"
쇼는 뒤늦게서야 열렬한 루트의 시선을 눈치채고 얼굴을 찡그렸다. 루트는 코를 찡그리면서 웃었다.
"아니. 좀 신기해서."
루트는 왜 자신이 이런 생경한 감정에 사로잡히는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쇼나 리스가 아이를 보호하는 모습은 몇 번이고 봐 왔었지만, 자신이 실제 경험해 본 적은 그다지 없었다. 어린아이의 입장에서 믿음직한 어른에게 보호받는 것은, 그녀로서는 매우 낯설은 감각이었다.
"믿음직한 어른이란 건 이런 느낌이네."
"......"
"어떨까. 나도 어렸을 때 당신같은 누군가가 이렇게 곁에 있어줬다면. 내 인생은 조금 달라졌을까?"
"......"
낮게 가라앉은 루트의 목소리에 쇼는 코웃음을 쳤다.
"그럴리 없지."
"앗, 냉정한걸."
"수작 부리지마, 루트."
쇼는 확신하는 말투로 묵묵하게 쏘아붙였다.
"넌 그냥 너야. 네가 어떤 어린시절을 보냈든, 네 성격은 원래 그렇게 개 같았을 거라고. 어려진 틈을 타서 불쌍한 척 점수 따려고 하지마."
"........들켰어?"
"완전 들켰어."
으음, 안 먹히네. 루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자긴 정말 빈틈이 없다니까. 그래서 억지로 만들어야 하지."
"그래, 테이저건 같은 거로 말이지. 정말 지긋지긋해."
"자기가 원한다면 좀 더 다양한 방법을 연구해볼께. 나한테 질리지 마."
쇼는 아양을 부리며 달라붙는 그녀를 기분나쁜 시선으로 쳐다보며 밀어냈다. 그리고 동시에 루트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크나 작으나 루트는 루트군."
루트의 주머니에서 작은 추적장치를 꺼내 든 쇼는 혀를 차면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또 들켰네. 루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얼버무리듯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음, 나도 그 사람들이 평범한 인신매매범 같은 거라면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는데."
"......그런데?"
"사민도 노리는 거 같던걸."
과연. 어린애를 데려간 후 그걸 인질로 삼아 동행인 성인 여자까지 납치할 셈이었다 이건가.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다.
"내가 그딴 3류 양아치들한테 넘어갈 거라고?"
"그치만."
루트는 곤란한 듯이 눈썹을 찡그렸다.
"맨 오른쪽에 서 있던 남자가 약간 자기 취향으로 생겼더라고."
"..................."
"...그렇지?"
"...어떻게 생겼던 간에 그런 급 떨어지는 놈한테는 흥미 없어."
"으음, 과연. 사람의 됨됨이를 본다 이거지? 마치 자기가 내 얼굴은 맘에 들어도 나한테 안 넘어오는 것처럼."
"네 내면이 엉망진창이라는 점은 인정하는군."
"내 얼굴이 자기 취향이라는 것도 인정하는거고."
".......빨리 널 한 대 패고 싶은데, 언제쯤 원래대로 돌아올 예정이지?"
"글쎄..."
그러고보니 그런 문제가 있었지. 루트는 줄어든 자신의 어린 몸을 훑어보면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뭐, 어때. 당분간은."
그러나 곧 그 고민은 접어버리고, 쇼가 흠칫 놀랄 정도로 어린아이다운 미소를 가득 머금었다.
"자기가 이렇게 상냥하다니 어려진 것도 나쁘진 않네."
◇
다음날.
의외로 문제는 빠르게 해결되었다.
"안녕, 자기. 오늘도 여전히 내 취향인걸."
".........................."
잠에서 깨어난 쇼는 자신의 위에 올라타서 극상의 미소를 지으며 웃고 있는 밉살맞은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긴 팔다리, 부드럽게 웨이브진 짙어진 빛의 머리카락, 재수없는 표정에 재수없는 말투. 그녀가 아는 루트 그 자체였다.
"깨어나보니 돌아와 있더라고. 자기 덕분이야."
찡긋 윙크를 날리는 루트를 보면서 쇼는 이를 갈며 말을 내뱉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부터 설명..."
쇼의 말은 끝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자신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터무니없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더 가늘고 새된, 어린 목소리. 아니, 설마. 그럴리가 없어. 쇼는 맹렬하게 자신을 덮쳐오는 기시감을 떨쳐내려고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따라 진짜 귀여운걸, 샘. 키스해도 돼?"
"될 거 같아?!"
쇼는 태연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로 자신의 볼에 입을 맞추려는 루트를 떨쳐내기 위해 팔을 휘둘렀다. 그러나 자신의 기억과는 한참 다른 짧고 가는 팔은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루트는 쇼의 어린 팔을 가볍게 잡아 침대 위에 내리눌렀다.
"그렇지. 생각해보니 자기도 태어날 때부터 그런 근육덩어리였을리는 없는걸."
"말도 안 돼. 거짓말이지...?"
"으음────"
루트는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옆에 있는 거울을 집어들었다.
"자기의 빠른 현실순응을 위해 준비했어."
"................"
거울 안에 비친 어려진 제 모습에 쇼는 침묵했다. 아니, 이게 무슨 전염병이야? 이 따위 대책 없는 전개로 뭘 어쩔려고?? 머릿 속에서 빠르게 수많은 욕지기들이 튀어나왔지만, 내면은 어른인 어린 쇼는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아직까지도 제 위에 올라타 있는 루트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 해봐."
"나는 원래대로 돌아왔고, 대신 자기가 어려졌어."
"아니, 네가 왜 날 깔고 앉아있는지를 설명하라는 거거든."
"으음. 원상복귀 된 걸 알려줄려고 자기 방에 몰래 침입해오니까 작아진 채로 누워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자기를 도구 하나 사용 없이 제압할 수 있는 날이 올 줄은 몰랐어. 나 지금 너무 설레는걸. 키스해도 돼?"
"될 거 같냐고!! 어린 애한테 무슨 짓이야?!"
"걱정하지마. 크든 작든, 쇼는 쇼인걸. 난 상관 안 해."
"아, 미친! 경찰 어딨어?!"
리스! 쇼는 허우적거리면서 간신히 손을 내뻗어 머리 맡의 휴대폰을 들고 리스와 바로 연결되는 버튼을 눌렀다. 지직, 지지직─ 귓 속의 이어피스에서 곧 소리가 잡혔다.
[───..──쇼?]
"리스! 빨리 와서 이 미친 여자 좀 잡아 ㄱ"
[쇼, 지금 어디야? 문제가 생겼는데... 그... 뭐냐.]
평소답지 않게 불안한 그의 음색에, 쇼는 다시 한 번 불안한 기시감에 다시 휩싸였다.
[핀치가 새로 변해버린 것 같아...!]
"아 이 팬픽 진짜 미친 거 아냐?!"
"으응, 진정해 자기. 무슨 말인지 또 못알아듣겠으니까."
"손 치워, 멍청아!!"
새로운 문제거리가 또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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