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는 으르렁거리면서 세번째로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경계심에 털을 잔뜩 세운 고양이-앞발에 잘못 맞았다간 피떡이 되어 바닥에 나동그라질 것 같은 그런 고양이-같은 그녀를 보면서 루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역시 똑같은 말을 세번째로 반복했다.
"쇼. 거기가 제일 안전하다니까."
".........."
이 대치상태를 어쩌면 좋지. 루트가 느긋한 표정으로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는 것을 노려보며, 쇼는 낮고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시뮬레이션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건 알겠어."
"좋아. 한결 긍정적이네."
"그렇지만 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도 아직 유효해."
"흐음. 아직 갈 길이 머네."
"그리고, 어..."
쇼는 시선을 고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흘리면서 자신의 목덜미, 정확히는 왼쪽 귀 뒤를 어루만졌다.매끈해보이는 목 언저리를 문질러대는 그 모습에 루트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처음보는 행동인걸. 내가 모르는 사이 새로운 습관을 만들어 온 모양인데. 루트는 그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았고, 손을 뻗어 쇼의 손을 마주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 자신의 손가락을 흘려넣어 어디에도 도망가지 못하게 단단히 옭아매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봐, 사민."
"...?"
"이게 시뮬레이션 안이고, 우리가 지하철로 가는 순간 보고있던 사마리탄이 우리 아지트의 위치를 알아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렇게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거겠지만─ 그렇다면 사실 이미 나랑 자기가 수차례나 '지하철'이라고 말한 시점에서 이미 들킨거나 다름없지 않겠어? 사마리탄은 똑똑하다구? 그 정도 단서만 있어도 금방 검색해낼 걸? 자기가 나랑 지하철에 가든말든 우린 이미 망했다구?"
"...대체 어느 부분이 긍정적인 거야?"
쇼는 어이없다는 듯 눈을 찡그리면서 루트의 손을 털어냈다. 그 투덜거리는 목소리의 단단함이 한결 누그러진 것을 깨달은 루트는 다시 생긋 미소지으면서 쇼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가자. 저 쪽도 뭔가 일이 좀 있는 모양이야. 해가 뜰 때까지는 우리끼리 대기하는 게 좋을 것 같은걸."
루트는 의뭉스럽게 말꼬리를 늘이면서 쇼의 팔을 잡고 있던 손가락을 슬그머니 소매 안쪽으로 미끄러트렸다. 그 의미를 넘치도록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쇼는 눈을 찡그리면서 퉁명스럽게 말을 끊어냈다.
"어쩌라고?"
"어쩌면─ 우리 사이를 좀 더 실감할 수 있는 어떤 좋은 행위가 있을지도 모르지."
날카로운 말과는 달리 내치지 않은 손을 잡아 노골적으로 문지르면서, 루트는 녹아내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분명 도움이 될거야."
"그거 해봤는데 별 차이 없었거든."
쇼는 아무렇지도 않게-그러나 맞잡은 손에 약간 힘이 들어간 것을 루트는 놓치지 않았다.- 대답했고, 동시에 루트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뭐야?"
손을 잡은 채로 걸음을 멈춰버린 루트 덕분에 앞서가던 쇼도 덜컥 걸음을 멈추었다. 신경질적으로 돌아보면 어쩐지 뾰로통해져 있는 루트의 얼굴이 쇼의 눈에 들어왔다.
"...뭔데?"
"그건 좀 치사하네."
"............뭐?"
"그동안 난 자기의 그림자 하나 보지 못하면서 지내왔는데, 그 사이에 자긴 나랑 7000번이나 한 거야?"
"........................................"
쇼가 아득해진 정신을 간신히 다시 붙들었을 때는, 루트의 말이 끝나고도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야, 방금 엄청 현실감 있었어. 너 진짜 루트같은 말을 하네."
"어머, 그래?"
"칭찬 아니거든. 완전 크리피하다는 의미거든."
어쩜 이렇게 한결같은 여자일까. 쇼는 어이없다는 듯 쏘아붙이다가 문득, 몸이 아주 약간 가벼워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머리 속도 조금은 산뜻해졌다. 어쩌면 이것은 정말 현실일지도 모른다.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혹은 또 그럴 수도 있다. 확률은 반반이고, 눈 앞에는 루트가 있다.
판단을 유보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
"좋아, 어디든 가. 자기 말대로, 지하철이 아니어도 상관없어."
"...?!"
루트가 잡아끄는 통에 쇼는 다시 휘청거리면서 그에 끌려 걷기 시작한다.
"어디로 가게?"
"어디든. 내가 그동한 못한 분을 보답받을 수 있는 곳이면 돼."
"아, 미친. 그 화제 아직 안끝났어??"
"어머, 시작도 안했거든?"
자신에게 이끌려 질질 따라오는 쇼를 돌아보는 루트의 눈이 가늘게 휘어진다. 과연, 그 눈웃음은 꽤나 현실감이 있는 것이었다.
"그럼, 가는 동안 내가 없는 사이에 나랑 어떤 플레이를 했는지 상세하게 좀 들어볼까? 오늘 밤에 참고 좀 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