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쇼위크 1주차
#욕실
-160904 1차 수정
긴급 구조 요청
by. 칡즙
오랫만에 점심이 지나도록 아무 넘버의 출현도, 별다른 사마리탄의 위협도 없었다. 강의가 없는 핀치는 선약도 없이 성적 정정이니 질문이니 하면서 오피스에 들이닥치는 학생들을 피하여 지하철로 내려왔다. 늦은 아침을 먹고 돌바닥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을 즐기면서 여유롭게 챙겨온 시험지들을 채점해나간다. 사각, 사각, 핀치의 펜과 베어의 나른한 하품소리만이 깔리는 가운데, 점심 때쯤 되어서는 리스와 쇼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마냥 차례차례 지하철로 들어왔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보는 핀치를 보고 쇼는 고개를 까딱, 리스에게로 한번 기울여 보이면서 대충 둘러대듯 말했다.
"둘 다 비번이에요."
...리스씨는 확실히 비번이 맞습니다만 미스 쇼는 아닐텐데요. 핀치는 쇼의 말에 그렇게 대답하려다가 곧 어깨를 으쓱하고 그만두었다. 그는 그녀의 백화점 근무-와 별도의 스페셜한 야간 근무-의 고용주가 아니었다.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간만에 찾아온 전화벨 울리지 않는 날이었기에 핀치는 조금 관대한 마음이 되어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는 길에서 만난 두 사람의 손에는 바로 앞 골목에 늘비해 있는 가게에서 사온 듯한 중국식 테이크아웃 음식들이 가득 들려있었다. 식사하겠어요, 핀치? 리스의 질문에 핀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남겨둘게요. 당신 건 따로 사왔거든요."
리스가 다른 손에 든 봉투를 흔들어 보이고는-이 부근에서 쇼는 불쾌한 듯 코 끝을 살짝 찡그렸다- 옆에 밀어두었다. 그 짧은 대화를 끝으로 다시 지하철에는 기분 좋은 침묵이 내려앉는다. 사람의 목소리 대신 부드럽게 깔리는 백색의 소리들. 펜이 시험지 종이를 긁는 소리, 젓가락이 종이그릇에 부딪히는 소리, 몇 번이고 바닥에 떨어지는 젓가락 소리와 낮은 한숨소리. 베어가 쇼의 발밑에서 애절하게 끙끙거리는 소리.
실로 간만에 찾아온 평화로운 날이었다.
지직─, 직, 지직────
그리고 책상 위의 스피커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나온 잡음이 그 고요한 평화를 시원스레 무너트린다.
" " "........." " "
핀치는 숨을 삼켰고, 리스는 미간을 찡그렸고, 쇼는 입으로 가져가던 치킨을 다시 그릇 안으로 던져넣었다. 느긋하게 흐르던 공기가 차갑게 조여오기 시작했다.
지직─, 직────
지직거리는 잡음이 몇 번 반복된 후─ 마침내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의미를 갖춘 언어의 조합이 흘러나왔다.
[아, 됐네. 으음. hello~?]
경쾌하고 리드미컬한, 익숙한 목소리.
"...에이 저 망할 ㄴ"
"너무 나쁜 말 쓰지 마세요, 미스 쇼."
이를 박박 갈면서 못된 말을 작게 씹어삼키는 쇼. 그녀에게 또 역시 작은 목소리로 주의를 주는 핀치. 그리고 어깨를 툭 늘어트리면서 다시 식사를 재개하는 리스. 셋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아무도 그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도 없어요~?]
태평한 목소리에 핀치가 먼저 재빠르게 시험지에 눈을 돌렸다. 리스와 쇼는 서로 흘끔거리면서 맹렬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한마음 한 뜻으로 한사코 대답을 거부하는 동료들에게서 느껴지는 뜨뜻미지근한 동료애에, 마침내 루트는 한숨을 쉬면서 스피커 너머로 한 명을 콕 찝어 지목했다.
[거기 있는 것 알아, honey.]
"아, *****!!"
"...너무 나쁜 말 쓰지 마세요, 미스 쇼."
"당첨될 줄 알고 있었잖아, 쇼."
핀치의 맥빠진 제지와 리스의 이죽거림을 귓등으로 흘려넘기면서 쇼는 할 수 없다는 듯 혀를 한 번 차고는 영 내키지 않는 태도로 꾸물꾸물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킨조각을 입에 문 채로 있는 힘껏 무성의를 담아 대답한다.
"뭐야, 또?"
[아, 그게.]
쓰기 좋은 전화는 내버려두고 이건 또 뭐하는 수작이야? 어느새 스피커의 멱살이라도 쥘 듯 그 앞에 서서 으르렁거리는 쇼의 말에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대답한다.
[나 갇혔어.]
" " " ...! " " "
이번에야말로, 지하철의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쇼는 리스에게 눈짓을 던졌고, 이미 자신의 무기를 챙긴 리스는 그녀에게 총 한자루를 던져주었다.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난 핀치가 위치 추적을 위해 컴퓨터 앞에 앉는 순간,
[우리 집 욕실에.]
"놔 봐, 존. 저거 죽여버릴거야, 진짜."
"그래. 스피커 말고 사람을 죽여야지, 쇼."
리스는 스피커를 향해 총을 겨누는 쇼를 뒤로 질질 끌어내면서 능숙하게 그녀의 손에서 총을 빼앗았다. 핀치는 세상 멸망 직전까지 보고 온 사람마냥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면서 탈진한 듯 의자 등받이에 깊게 몸을 묻었다. 리스는 다시 자리를 잡고 우직하게 식사를 재개했다. 쇼도 욕지기를 씹어뱉으면서 리스의 앞에 도로 마주앉고는 집어던졌던 치킨 박스를 자신의 앞으로 잡아당겼다. 다시 침묵.
[자기야?]
쇼는 리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리스는 짧게 고개를 내저었다. 핀치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핀치는 느릿한 슬로우 모션으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회피했다. 망할 보이스카웃 놈들 같으니. 도움이 안되는구만! 아무래도 이 멍청한 스피커에게 대답을 해줘야 할 사람은 쇼 그녀 뿐인 것 같았다. 쇼는 긴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켜 스피커 쪽으로 어슬렁거리면서 다가가며 천천히 지금까지 들은 상황을 정리해나간다.
"그러니까... 지금, 네가─ 너희 집 욕실에 갇혀 있다고?"
[응, 문 프레임이 충격을 받아서 뒤틀렸나봐. 안쪽에서는 도저히 안 열리는걸.]
"너 진짜 돌은거야?!"
정리를 마친 쇼는 마침내 침착하게 폭발했다.
"고작 그딴 아무래도 좋을 멍청한 소식 하나 전하려고 여기 스피커를 해킹한 거냐고? 넌 대체 뭐가 문제야? 머리?? 역시 머리인가??? 머리밖에 없겠지!!"
[어쩔 수 없잖아. 난 방금 샤워를 했고, 옷도 전화기도 전부 문 밖에 있고.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녀한테 도움을 좀 받아서, 자기가 내 방에 설치해둔 도청기를 통해 그 쪽 스피커에 통신을 연결─]
"미스 쇼...?"
변명하듯 길게 줄줄 이어지는 루트의 말에 핀치는 잔뜩 동요한 목소리로 쇼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힐난 섞인 시선에 쇼는 한 쪽 눈을 찡그리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왜요?"
"미스 쇼, 그건 명백한 사생활 침해입니다."
"헐. 해롤드, 지금 나 비난하는 거에요? 솔직히 사생활 침해 넘버원 프로페셔널은 그 쪽이면서."
"그, 그건 사람을 구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아니, 전 동료의 사생활을 함부로 침해하거나 하진 않습니다...!"
"동료니까 하는 거지. 애가 죽었나 살았나는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저 남자도 댁한테 위치추적장치 안 붙여놨을 것 같아요? 쇼는 리스를 가리키면서 대들었고, 핀치는 놀란 눈을 하고 리스를 쳐다보았으며, 리스는 아무말 없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리스 씨! 더 이상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습니까!"
"흠. 전 경찰이라서요. 정황 증거말고 물증이 없으면 소용없는데요. 해롤드."
"리스 씨!"
조곤조곤 시작된 둘 사이의 공방에 쇼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짜증스레 대답했다.
"뭐. 그래서 어쩌라고. 문이 안 열리면 부수고 나오든가."
[...난 자기랑은 달라. 문이란 건 그렇게 쉽게 부서지는 게 아니란다.]
"약해빠졌네. 운동 좀 해라. 그러니까 베어한테조차 질질 끌려다니지."
[흠.]
매번마다 차갑게 돌아오는 쇼의 대답에 루트는 잠시 말을 끊더니, 곧 명백하게 일부러 꾸며낸 달콤한 목소리로 아양을 부리며 속삭였다.
[문 너머 어딘가에 있을 도청기에 목소리를 닿게 하려고 욕실 문에 바싹 붙어 혼잣말하고 있는 알몸의 나를 보고 싶지 않아?]
"아... 솔직히 완전 꼴사나울거 같아서 엄청 보고 싶긴 한데, 그딴 하찮은 구조 작업에 내 노동력을 바치고 싶진 않네. 미안."
[으음, 안 통하네.]
"오늘 넘버는 없습니다. 미스 쇼. 신경쓰이시면 가보셔도..."
루트의 얄팍한 유혹에도 코를 울리며 요만큼도 흔들리지 않는 쇼에게 핀치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었다. 이 안경잽이가 뭐라는 거야?
"나올지도 모르잖아요. 넘버."
"넘버가 나오면 내가 가지. 난 진짜 비번이거든."
명백하게 일부러인듯한 리스의 배려에 쇼는 인상을 확 구기면서 리스를 돌아보았다.
"아 그럼 네가 저거 구하러 가던가."
"싫은데." / [싫어.]
동시에 튀어나오는 대답에 쇼는 어깨를 살짝 움츠리면서 중얼거렸다.
"너네 진짜 사이 안 좋네. 친하게 좀 지내, 동료들끼리."
"사이의 문제가 아니야, 쇼. 난 루트의 그런.......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아. 기껏 좋은 밥 먹고 소화 안되게..."
"...너네 진짜 사이 안 좋네..."
가만히 듣고 있던 스피커 너머로 루트는 조금 실망한 듯 샐쭉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자기 진짜 이럴거야? 이건 솔직히 자기 탓이잖아.]
"뭐? 내가 왜?"
쇼는 뜻밖의 지적에 어리둥절하여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머, 진짜 몰랐어? 이거 어제 우리 욕실에서 하다가 자기가 날 문가로 집어 던질 ㄸ───]
쾅!!!!!!
굉음과 함께 스피커는 침묵했다.
"......"
"......"
"......"
손 아래 박살이 난 스피커-였던 잔해-를 자연스럽게 바닥으로 쓸어버리면서─ 쇼는 천천히 바싹 굳어있는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려 딱딱한 목소리로 묻는다.
"들었어요?"
"아니." / "아니요."
"...들었을텐데."
"..." / "..."
아, 대학에서 급한 연락이 왔네요.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핀치가 먼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해요, 핀치! 리스의 배신감 가득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재빠르고도 현명하게 모습을 감추었다. 피부를 째는 듯한 시선을 느끼면서 리스는 천천히 눈을 굴리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좋아. 들었지만 잊어버렸어."
"...좋아."
억지 합의를 마친 쇼는 부득부득 이를 갈면서 벗어놓았던 후드 점퍼를 걸쳤다.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공구 상자를 챙기는 그녀를 리스는 먼 눈을 하고 쳐다보았다. 핀치는 이미 채점 중인 시험지에 코를 박고 있었다.
"...잠깐 나갔다 올께요."
심기불편한 듯 쿵쾅쿵쾅 발을 울려 걸으면서 사라지는 쇼의 뒤로,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동료의 사생활을 알게 된 두 남자만이 지하철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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