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쇼위크 3주차
#술주정
-160919 1차 수정
g.f.
by. 칡즙
**호텔
****호
짧은 문자를 받은 루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 맥락없는 단촐한 메시지의 발신자는 쇼였다. 뭐지, 이게? 오늘 밤에 여기서 보자는 건가? 아니, 쇼는 루트와의 로맨틱한 밤을 위해 굳이 호텔씩이나 예약하는 위인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누구보다 더 현실을 잘 알고 있는 루트는 고개를 살짝 내저으면서 그 가설을 빠르게 부정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통화연결음이 끊길 때까지 저 쪽에서는 영 받아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무슨 일일까?"
루트는 흘끗 폰의 카메라 앵글을 바라보며 물었다. 삑, 삑삑. 곧 수신음과 함께 몇 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첫번째는 보고서 형식을 갖춘 문장의 나열이다. 근처의 불순한 약물을 취급하는 갱단에 대한 간략한 정보들. 루트도 알고 있었다. 오늘 나온 넘버 중 하나는 이 그룹이 한낮부터 벌이는 술과 온갖 약물들로 점철되는 파티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으니까. 인력 부족의 관계로 오늘은 머신팀 각자가 개별적으로 활동했고, 이 파티에 참석한 넘버를 보호하기 위해 잠입한 것은 쇼였다. 잠입한지 채 2시간도 되지 않아 깔끔하게-그리고 살짝 난폭하게- 넘버를 구출해냈다는 보고도 머신에게 이미 받은 후였다.
"이건 왜?"
질문을 던지면서 다음 메일을 확인한다. 짧은 영상 클립이었다. 어둑한 창고 안. 널브러져 있는 술병들. 그 사이사이 빼곡하게 엎어져 있는 사람들. 제 발로 서 있는 것은 오로지 작고 단단한 체격의 여자 한 명 뿐이었다. 흐릿한 해상도였지만 누구인지는 자명했다. 마지막으로 뒤에서 덮쳐오는 자신의 몸집의 3배 쯤은 되어보이는 덩치를 가뿐하게 집어던지는 모습을 보며 루트는 조금 감탄한다. 그러나 그 이후 이어지는 모습에 곧 미간을 찌푸렸다.
"...응?"
기분 탓인가. 쇼의 몸이 방금 굉장히 크게 휘청거린 것 같은데. 고작 사람 몇 명 집어던지면서 중심이 흐트러질 그녀는 아니었다. 쇼가 근처의 물건을 짚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세를 바로하는 장면에서 영상은 종료되었다.
"......"
다음 메일은 음성녹음파일. 루트는 지체하지 않고 그 파일을 재생했다.
- 끝났어요, 해롤드.
- 수고하셨습니다.
- ...음...
- 미스 쇼...?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습니까?
- 왜요.
- 그러고보니 혹시 그 파티장에서 술을 좀 드시지 않으셨나요?
- 그게 왜요.
- 아뇨!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그 파티의 성향을 고려해봤을 때, 단순히 술 뿐만 아니라 좋지 않은 약품들이 섞였을 가능성도─
- ...다른 넘버 나오면 연락해요. 핀치.
불손하게 끊는 쇼의 마지막 말과 함께 음성 파일도 끝이 났다.
"과연, 대충 알겠어."
루트는 걱정스러움을 감추듯 코를 찡그리면서 쓰게 웃었다.
◇
**호텔. ****호.
루트는 문 앞에서 잠시 호흡을 고른 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
대답은 없었다. 이번엔 좀 더 세게. 더 오랫동안.
"......"
역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루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만능열쇠를 꺼내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콰당탕─!!
"?!"
문 안에서 들리는 요란한 소리에 놀라 움찔 튀어오른 루트는 그대로 굳어서 빤히 문을 쳐다보았다.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얌전히 자리에 서서 다음에 이어질 상황을 기다려봤지만 문 안 쪽은 다시 쥐죽은 듯이 잠잠해졌다.
"......쇼?"
한참동안 다시 침묵이 계속되자 참다못한 루트는 다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며 상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쾅, 콰당, 와장창, 하고 여기저기 부딪히고 깨지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허둥지둥 만능열쇠를 마저 꺼내려는 순간 마지막으로 콰앙!! 하고 문에 무언가가 세차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 박력에 놀라 다시 멈춰버린 루트가 눈만 깜빡이고 있노라니, 마침내 안쪽에서부터 철컥, 하고 시원스럽게 문고리가 돌아갔다.
끼익─
살짝 열린 문 틈 사이로 보이는 것은 그녀의 작고 사랑스러운 소시오패스. 그 모습에 자연스럽게 루트의 입꼬리가 올라가려다가, 다시 멈추었다.
"사민?"
"─으음."
문에 반쯤 기댄 쇼는 느릿하게 목소리를 흘려냈다. 삐딱하게 기운 고개로 올려다보는 얼굴에 언제나 늘상 기본으로 고정되어 있는 그녀 특유의 화난 표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약간 졸린 듯 해보이고, 조금은 뭐랄까─ 루트는 바싹바싹 마르는 입술을 혀로 살짝 핥았다. 평소와는 다른 그 표정을 아주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주로 그녀와 잠자리를 하기 전, 혹은 하고 난 후. 혹은 그녀한테 뒤통수를 맞아 목에 주사기를 꽂은 채로 잠들기 바로 직전.
"......"
반쯤 감긴 눈. 조금 빨갛게 달아오른 귀. 가만히 귀기울이면 가쁘게 달아있는 호흡. 명백하게 사람을 홀리려는 얼굴을 한 채 쇼는 루트를 뚫어져라 올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기다리다 지친 루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들어가도 될까?"
평소보다 한층 상냥하고 조심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쇼는 몇 번 눈을 꿈벅거리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콜걸 부른 적 없는데."
"으응, 고마워. 자기가 제정신이 아닌건 아주 잘 알겠어."
"너 얼만데에─ 아이쿠!"
루트는 앞으로 크게 휘청이며 문과 함께 흘러나오는 쇼의 몸을 받아내며 맥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껏 와닿는 그녀의 피부가 불에 달군듯이 뜨거웠다. 응, 정말 안좋네. 보고서에 의하면 그 갱단 녀석들이 취급하는 약품은 대게 그렇듯이 주로 암페타민 계열의 향정신성 의약품. 즉 엑스터시나 그 친구 정도 되는 것들이다. 쇼가 스스로 약을 들이켰을리는 없고. 술도 분명 거의 먹는 시늉만 했을텐데. 루트는 메일로 훑어보았던 보고서 안에 호흡기로 흡입할 수 있게 개조된 신약품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던 것을 어렴풋이 기억해냈다. 밀폐된 공간과 전혀 환기가 되지 않는 내부 구조. 그 안에서 효과적인 잠입을 위한 2시간 가량의 위장. 대충 그러한 이유에서겠지.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파악하고 이 호텔에 스스로 감금한 건가. 과연 그녀다운 방식이다. 간신히 위치까지 보내고는 정신을 잃은 모양이지. 루트를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쇼의 폰을 흘끗 바라보며 소리없이 혀를 찼다.
"뭐 어때, 이리 와."
"우왓...!"
어느새인가 몸을 가누고 제대로 선 쇼는 웅얼거리면서 루트의 팔을 쭉 끌어당겼다. 멍하니 서서 상황을 정리하고 있는 그녀의 생각이 툭하고 끊어졌다.
"잠깐, 사민?"
"미안, 좀 급해서─ 어쨌든 내 방에 들어왔으니 대충 상호합의 된거겠지이─"
자기 몸이 제대로 통제가 안되는 탓인지 쇼는 조금도 힘 조절을 하지 않았고, 당연히 루트는 그녀가 이끄는대로 휘청휘청 끌려나간다. 방향은 여지없이 침대 쪽이었다.
"이건 좀──?!"
뭐라고 말을 꺼내보기도 전에 루트는 그대로 침대 위로 내동댕이 치듯 던져졌다.
"아야야..."
세차게 던져진 통에 눈앞이 빙빙 돌았다. 루트는 침대에 파묻히다시피 한 채로 이마를 짚고 앓는 소리를 흘려냈다. 그 모습을 보며 쇼는 영 개운치 않은 듯 입맛을 다시며 웅얼거렸다.
"뭐어... 맘에 차는 건 아니지마안."
"...잠깐, 내가 맘에 안차?"
"응."
어째서 그 부분만 또렷하게 대답하는 건데. 루트는 가벼운 배신감을 느끼면서 그녀를 가볍게 쏘아보았다. 그러거나말거나 쇼는 연신 머리를 휘휘 털어내면서 침대 위로 올라왔다. 곧바로 루트를 밀어 눕히더니 그 위에 빠르게 올라탔다.
"어쩔 수 없지이..."
"?!"
쇼는 끝까지 불퉁한 듯 불만을 흘리면서, 루트의 코트를 내버려둔 채 곧바로 그 안의 셔츠 단추부터 손 끝으로 긁어대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밀쳐내려고 해봤지만 요지부동이다.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네. 루트는 그간 그녀가 얼마나 그녀 나름대로 자신을 배려해줬는지를 새삼 실감하면서 끄응-하고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루트는 자신의 셔츠에 매달려서 열심히 단추와 씨름하고 있는 쇼를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쳐다보면서 물었다.
"내 뭐가 맘에 안 차는데?"
"으응?"
루트의 쇼는 고개를 들고 흐려진 눈으로 몽롱하게 시야를 맞춰왔다. 아, 조금 귀엽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손이 부욱! 하고 힘있게 루트의 셔츠를 찢어냈다. 이건 별로 안 귀여운걸...
"별로... 내 타입 아니라서... 얼굴은 괜찮지만..."
"괜찮지만?"
"...근육도 없고... 싸움도 못할거 같고... 너드 같은 게에..."
"......"
너같은 애도 수요가 있나아? 늘어지는 말투에도 묵직하게 사람을 패는 뼈아픈 질문에 루트는 잠시 쇼가 제정신이 아닐까 의심했다. 이 빚은 반드시 갚아줘야지. 루트는 조심스럽게 다짐했다.
"후─"
어느정도 루트를 벗겨내는 것에 만족한 쇼는 이제는 제 셔츠 단추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팔에 조금 여유가 생겼다. 루트는 재빠른 동작으로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 한 손을 넣었다.
"그렇게 맘에 안 들면 다른 애로 바꿀래?"
루트가 행여 쇼가 자신의 움직임을 눈치챌까봐-아마 그러지 않아도 그녀는 알아채지 못할 것 같았지만-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을 건네보았다. 쇼는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말없이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까닥, 까닥, 제대로 가누어지지 않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몇번 돌리더니 이내 천천히 가로젓는다.
"......괜찮아."
"어라, 정말?"
쇼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큰일났네, 역시 좀 귀여운걸. 루트는 집중이 흐트러지는 것을 얼른 다잡았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몽롱하게 고정되어 있는 걸 확인하면서, 조심스럽게 진정제가 담긴 주사기를 꺼내들었다.
"나로 괜찮겠어?"
"으응. 뭐어."
쇼는 느릿하게 자신의 셔츠를 벗으면서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왜냐하면 너어─."
바싹 얼굴을 맞대고, 눈꼬리를 늘어트리면서 웃는다. 루트는 숨을 죽였다.
"내 여친 닮았다."
푹─
"으──"
풀썩. 쇼의 몸이 그대로 루트의 몸 위로 늘어졌다. 한사람 분량의 중량을 온 몸으로 만끽하면서 루트는 한동안 움직일 생각도 없이 눈만 껌벅거렸다. 그렇게 몇 분이고 흘려보낸 다음에 루트는 천천히 호흡을 들이키면서 탁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거 녹음했어?"
탁자 위에 놓인 쇼의 폰이 그에 응답하듯 붉은 빛을 깜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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